조부는 1921년 음력 1월 강원도 인제 남면에서 태어났다. 본래 증조부 가족이 살던 곳은 경기도 파주였다. 증조부는 만세운동을 했다가 일제 헌병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몸이 크게 상했다고 한다. 결국 핍박을 못 이겨 강원도 인제의 어느 산골로 피신했고, 거기서 조부를 낳았다. 조부는 삼형제 중 막내였다. 조부가 어릴 적에 가족은 서울로 이사 갔다. 지금의 신촌역 부근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조부의 큰형은 장남 답게 성실한 기질을 지녔다. 그러나 작은형은 깡패였다. 종로를 휘어잡고 있던 김두한 밑에서 깡패질을 하고 돌아다녔다. 행동대장 격의 지위까지 오르면서 근방에서는 꽤나 악명 높은 깡패였다고 한다. 조부는 1944년 징용 당해 일본 사세보 해군기지로 끌려갔다. 활주로를 닦는 공사에 투입되었는데, 미군 폭격기의 공습 때문에 여러번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거기서 해방을 맞았는데, 일본군이 징용자들을 방치한 채 퇴각해버리는 바람에 귀국을 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결국 기지 근방에 살던 일본인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밀항선을 타고 귀국했다.
해방 직후 혼란스런 정국, 큰형은 성실하게 일했지만 작은형은 김두한을 좇아 우익청년단 활동에 뛰어들었다. 조부는 전쟁 발발 직전 중매를 통해 조모와 만나 결혼했다.
전쟁 직후, 가족은 제때 피신하지 못했다. 인민군은 우익청년단 활동을 했던 작은형을 잡아갔고, 그후로 소식이 끊겼다. 큰형과 조부는 가까스로 피신했다. 인민군은 매일 집으로 와 큰형과 조부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가족은 때를 보아 증조모의 친척들이 살고 있던 경기도 양주로 야반도주했다. 1951년 음력 1월 한겨울, 미군 폭격기가 쏟아붓는 폭탄으로 인한 굉음과 진동 속에서 조모는 부친을 낳았다.
부친이 태어나자마자 가족은 남쪽으로 피란을 가야했다. 1.4후퇴의 여파였다. 가족은 국군의 퇴각 행렬을 따르는 피난민 무리에 합류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인민군과 중공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험한 산길로 이동했는데, 부친이 자지러지게 울 때마다 조모는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한다. 피난 와중에 큰형 부부 내외는 미군 폭격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맞아 폭사했다. 조부는 그 장면을 생생히 목격했다고 한다. 조부는 전쟁 와중에 두 형을 모두 잃었다.
가족은 피란 중에 엉겁결에 떠내려왔던 대전에 그대로 정착했다. 가족은 대전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집도 땅도 친척도 모두 서울과 그 근방에 있었다. 조부는 언제라도 다시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말하곤 했지만, 왠일인지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부는 대전방직에서 목수 일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가난에 찌든 생활이었다.
손자가 웬만큼 머리가 굵어졌을 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꺼낸 말은 "결혼해서 자식을 많이 낳아라"였다. 그때는 왜 굳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손자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언제인가, 비로소 징용시절을 비롯한 옛날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국근현대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던 손자이지만, 그 이야기에 담긴 삶의 무게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조부는 손자에게 두어 차례 징용시절 이야기를 해주었다.
손자는 언젠가 차례상 앞에서 조부의 형제들에 대해 여쭈었다. 전쟁 때 돌아가셨다고만 들었기 때문에 궁금했었다. 하지만 조부는 손자에게 자신의 형제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손자는 조부의 영정 앞에서 부친의 입을 통해 전쟁 시절의 이야기를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같이 듣고 있던 사촌 동생은 꼭 드라마 속 이야기 같다며 웃었다.
부친은 가족이 어디 한 곳에 발붙이고 살지를 못했기 때문에 번성하지 못했다며 안타까워 한다. 파주에서 인제로, 서울로, 양주로, 그리고 대전으로. 혼란했던 시절 여느 가족이 그렇지 않았겠느냐마는 우리 가족도 참 많이 고생했다. 조부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손자에게 결혼해서 자식 많이 낳으라고 훈계했고, 조모는 손자에게 밥은 절대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하는 법이라고 이르곤 했다.
노무현 정부는 일제시기 징용자 보상 정책을 시행했다. 부친이 서류를 꾸며 제출해보았지만, 생존자의 경우에는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란 답변을 들었을 뿐이었다. 조부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조부가 실망한 이유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아들이나 손자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어쩌면 그 한편으로는 새삼 느낀 상실감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징용자 보상 이야기는 조부로 하여금 젊은 시절의 고난을 상기시켰을 것이고, 거기에는 징용 시절 뿐만 아니라 전쟁 시절의 기억 역시 사무쳐 있을 것이다.
조모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신 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외롭게 삶을 견디셨던 조부는 2008년 음력 9월 27일 세상을 하직하셨다. 손자는 조부 생전에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다. 조부는 손자가 결혼하고 출세하는 걸 보고싶다 하셨지만, 손자는 조부 생전에 그 모습을 보여드리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저 알고 있었을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제 소상(小喪)을 앞두고 내가 다짐할 일은 가족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다.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언젠가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다면, 때를 보아 짐짓 심드렁하게 옛날이야기 하듯 기억을 전해주는 일이다. 그나마 조부의 손자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들 중 하나이리라.
- 2009/10/06 2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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