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5) - 남북협상의 경과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5. 남북협상의 경과


1) 북한의 통일정책


  해방 후 북한에서는 이른바 ‘민주개혁’을 추진하면서 독자적인 인민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모색하는 한편, 개혁의 성과를 기반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남한으로 확대한다는 ‘민주기지론’에 입각하여 통일정책을 추진했다.(각주 1) 1945년 말 이후 1946년 말에 이르기까지는 남북에서 좌익진영의 통일을 모색하는 시기였다면, 1947년 이후 분단이 가시화하는 시점에서는 통일논의의 대상이 남한의 우익까지 본격적으로 확대되는 경과를 맞게 된 것이다.


  2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미국이 한국 문제를 UN에 이관하자, 소련은 즉시 양군 동시 철수를 주장하며 미국을 압박했다. 미소의 대립이 심화하는 상황에서 북한은 ‘UN 감시 하 총선’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 했다. 1947년 9월경부터 통일정부 수립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11월 열린 북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대응 방안이 확정되었다. 그 내용은 1) 임시 통일헌법의 제정 공포, 2) UN 감시 하 총선거라는 UN 결의 반대, 3) 미소 양군 철수 후 남북 총선거 주장, 4) 남북의 통일세력 조직화, 이렇게 4개 항이었다.


2항과 3항은 소련의 주장에 부응하는 내용으로 특이하지 않지만 1항과 4항은 특기할 만하다. 두 항은 서로 충돌할 여지가 있었다. 1항은 남한에서 보통선거법을 제정하고 단독선거를 추진하는 상황에 맞서 북한식의 인민민주주의 정권을 선전하기 위한 방안이었다. 그 선전의 대상은 다름 아닌 남한의 대중이었다. 즉 1항은 ‘아래로부터의 통일전선’을 추동하기 위한 방안이라 볼 수 있다. 반면 4항은 명백하게 김구․김규식 등 남한의 우익을 염두에 둔 ‘위로부터의 통일전선’을 모색하는 방안이었다.


1항도 북한 지도부 내에서 논란이 되는 사안이었지만, 4항 역시 그러했다. 남로당은 47년 후반에 이르러 김구와 이승만이 서로 갈등하고 결별하는 과정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같은 ‘극우’로 보아 배척했고, 김규식․홍명희 등의 중도파까지도 배격했다. 남로당은 46년 말 이후 좌우 계급대립 노선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었다. 반면 김일성․김두봉 등의 북로당은 47년 말에 이르러 김구의 임정세력과 중도파 세력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48년 이후의 대남정책은 줄곧 북로당이 남북협상을 추진하고 남로당은 단정 반대 무장투쟁을 주도하는 형태였다.


1946년 8월 28일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한 북조선노동당 창당대회에서 주석단의 모습. 오른쪽부터 레베데프 소련군정 정치사령관 소장, 김두봉 당시 신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김일성 당시 북조선공산당 책임비서 등(출처 - 중앙일보)

북로당은 1947년 12월경 성시백을 남한에 파견하여 남북합작에 관해 임정․중도파 인사들과 연락을 취한 바 있고, 김일성은 1948년 1월 남한 우익을 포함하는 남북합작을 위한 회합을 열 것을 소련에 건의하기도 했다. 소련은 이러한 북로당의 시도를 제지했는데, 공교롭게도 2월 16일 김구와 김규식이 서신을 보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서신에 곧바로 답변하지 못했다. 북한은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2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을 발표했는데, 이에 반발한 북한 지역의 우익이 반대운동을 일으키려 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었다. 북로당과 소련은 2월 내내 이 사건의 처리에 힘을 쏟고 있었다.


2월 26일 UN소총회에서 ‘가능 지역만의 선거 실시’가 결정된 이후 북한은 남한의 정세를 관망하다가 김구․김규식의 적극성을 확인하고 남한의 우익과 합작을 모색하기로 결정했다. 이윽고 3월 25일 방송을 통해 ‘남조선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정당․사회단체’를 대상으로 남북회담을 제의하고, 김구․김규식에게 보내는 서신도 따로 전달했다. 이 서신에는 반탁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미소공위를 파탄시켰다는 김구를 향한 비판도 담겨있었지만, 핵심 내용은 김구 등이 제안한 ‘남북지도자회담’을 수정하여 ‘남북 조선 소범위의 지도자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안한 점이었다.


회담의 방식과 성격은 주도권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였다. 김구 등은 애초에 ‘남북지도자회담’을 남북협상의 핵심으로 상정한 바였지만, 북한은 이것을 ‘예비회담’의 위상으로 축소하고 따로 ‘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회의’를 본회담으로서 개최하자고 제안했다. 즉 김구 등은 남북의 동등한 참여에 유의하여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회합을 중시했지만, 북한은 전체적인 좌익의 주도권을 고려했던 것이다. 게다가 통일정부 수립에 관한 의제 설정에서도 이견을 내포하고 있었다. 김구 등은 미소를 대등한 견지에서 바라보며 남북의 단독정부를 모두 반대했지만, 북한은 미국과 UN에 대한 반대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2) 남한 민족주의자들의 북행


북한의 서신이 도착하자 미군정은 김구 등의 북행을 만류했다. 그러나 김구 등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두 김 씨는 공동명의로 발표한 성명에서 북한의 제의에 대해 “미리 다 준비한 잔치에 참례만 하라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면서도 “1차 회합이 성공치 못하면......10여차까지라도 기어히 남북통일을 쟁취할 의사”를 다지기 위해 연락원을 파견하는 등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남한의 좌익이 남북협상에서 최대한 우익과 중도파를 배제하고 주도권을 잡기 위해 김구와의 협의를 거부하고 서둘러 북행해버렸다. 때문에 김구 등이 추진했던 남한 정당․사회단체 대표자모임은 결성되지 못했다.


미군정은 “책상 위의 지도나 제공한다”며 ‘냉소적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국제 여론과 UN이 남북협상을 주목하고 있던 정국에서 명시적으로 반대하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군정은 남북협상을 실질적으로 저지하기 위한 공작을 멈추지 않았다. 만약 남북협상이 성공한다면 임박한 단독선거와 단정 수립에 악영향을 미칠 터였다. 미군정은 북행하는 좌익 인사들을 검거하는 한편, 김구와 김규식을 은밀한 방법으로 설득하고자 했다. 이를테면 김규식에게 접근해 남북협상에서 복귀한 후 이승만을 지지하는 선언을 발표할 것을 제안한 사례가 있다.


4월이 되어 연락원이 북행하여 회담 일정을 논의하는 등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되었다. 실무접촉 과정에서 양 측의 입장이 절충되었다. 북의 입장에서는 지도자회담을 예비회담으로 하자는 주장이 관철되었고, 남의 입장에서는 헌법 제정 문제 등을 제외하고 통일문제만을 논의하자는 주장이 관철되어 절충이 이루어졌다. 이제 남은 건 지도자들의 마지막 결단이었다. 남북협상 기간이 선거 기간과 겹치는 상황에서, 남북협상을 위해 북행한다는 선택은 곧 5.10선거에 불참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기 때문이다.


김구와 홍명희는 북행의 의지가 강했지만 김규식은 그렇지 못했다. 임정 내부에서도 엄항섭은 적극적이었으나 단정 참여를 모색한 바 있던 조소앙은 소극적이었다. 김규식은 남북협상이 결국 좌익의 주도로 끝나지 않을까 우려했다. 미군정의 적극적인 만류도 한몫했다. 게다가 강제가 있긴 했으나 남한 선거의 투표 등록률이 90%가 넘는 결과가 나왔다. 남한 단정 참가를 완전히 부정하고 있지는 않았던 김규식으로서는 부담스러운 상황이었다. 김구 역시 걱정이 들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4월 15일 가진 기자회견에서 비장한 어조로 다음과 같은 소회를 밝혔다.


“이번 남북회담에 대하여 큰 기대를 가지는 사람도 많고 낙관하는 사람도 있으나 참으로 금차(今次) 회의는 큰 기대를 가져야 할는지 단언하기 어려움을 유감으로 생각하는 바이다. 그러나 과거 미소 양국의 힘으로써 조선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조상이 같고 피부가 같고 언어와 피가 같은 우리 민족끼리 서로 앉아서 민족정신을 가지고 서로 이야기나 하여 보자는 것이 진의이며,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생을 깨끗이 조국통일독립에 바치려는 것이 금차(今次) 북행을 결정한 목적이다.”(조선일보, 자유신문, 서울신문, 경향신문, 1948. 4. 17)


북행길 38선 표지 앞에서(출처 - 야후)



김규식은 남북협상에서 최대한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몇 가지 전제조건을 내걸었다. 김규식이 내건 조건은 민련에서 논의되어 이른바 ‘남북협상 5원칙’으로 정리되었는데, 북한이 전격적으로 김규식의 요구를 수용함으로써 김규식 역시 북행을 결심하게 되었다. 비록 김규식은 북행을 거절하기 위한 명분 쌓기 목적에서 조건을 내건 측면이 있기는 했지만, 그 내용을 따져보면 결코 협상 자체를 부정하려 하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남북협상 5원칙’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어떠한 형태의 독재정치도 배격하고 민주주의 국가를 건립할 것.

② 독점자본주의 경제제도를 배격하고 사유재산제도를 승인할 것.

③ 전국적 총선거에 의해 통일된 중앙정부를 수립할 것.

④ 외국에 어떠한 군사기지를 제공하지 말 것.

⑤ 미소 양군의 조속한 철퇴에 관해서 미소 양국이 협상하여 공표할 것.


3) ‘남북대표자연석회의’ : 좌익의 주도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참석한 ‘남북대표자연석회의’(북한이 본회담으로 제안한 회합)가 4월 19일, 21~23일 4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본회담에서는 대체로 좌익에게 익숙한 의제들이 상정되었다. 김일성은 본회담의 의제로서 ‘4대 원칙’을 제시했고, 본회담에서는 이것에 의거하여 토론이 이루어졌다. ‘4대 원칙’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UN임시위원단 몰아내고 UN총회 및 소총회 결정의 무효화.

② 국토를 양단하고 민족을 분열시키는 단정 단선 반대.

③ 소미 양군의 즉시 동시 철퇴를 실현시킬 것.

④ 양군 철퇴 후 조선인민의 자주성 우에서 일반적․평등적․직접적 비밀투표의 선거에 의하여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


김구․홍명희는 4월 20일, 김규식 등은 21일에 평양에 도착했다. 김일성과 김두봉은 김구 등을 예방하여 연석회의 참석을 요구했지만, 김구는 거부하고 자신의 일관된 요구였던 지도자회담을 제안했다. 남북 지도자들 간의 회동이 몇 차례 더 열렸지만 뚜렷한 합의는 보지 못했다. 다만 본회담 이후 열릴 지도자회담에 기대를 걸며 소극적으로나마 연석회의에 참여했다. 김규식만은 끝까지 연석회의 참석을 거부했다.


1948년 4월 남북협상 당시 김일성과 김구(출처 - 야후)



연석회의 결과 몇 가지 문건이 발표되었는데, 그중 ‘조선 정치정세에 관한 결정서’(결정서)가 다른 문건들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에 중요하다. ‘결정서’는 조선 통일을 파탄시킨 주범으로 이승만․김성수 등의 ‘매국노 반동분자’와 UN을 조종한 미국을 지목하고 맹렬히 비판했다. 반면 소련군은 북한 인민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인민위원회가 건실히 세워져 민주개혁을 성사하여 ‘민주주의적 자주독립국가’의 토대를 공고히 했다고 평가했다. ‘결정서’는 또한 남한 단선을 ‘미 제국주의자들의 식민지 예속화 정책’의 일환으로 보면서 단정반대운동을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한 가장 정당한 애국적 구국투쟁’이라고 치켜세우고 있다. 결론에서는 남조선 단독선거를 반드시 파탄시키고 조선인의 힘으로 ‘통일적 민주주의 자주독립국가를 수립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소련의 제안을 실현시키기 위해 강력히 투쟁’하자는 표현으로 끝맺고 있다.


‘결정서’는 연석회의에서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지만, 남한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는 받지 못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김구 등은 앞으로 열릴 지도자회담을 기대하면서 연석회의를 파탄내지 않기 위해 소속단체의 이름으로나마 서명했다. 다른 문건들에서는 김구 등의 서명이 아닌 비서 등의 명의로 된 서명이 들어가 있는 사실이 확인된다. 연석회의를 통해 결정된 문건들에 대한 민족주의자들의 지지가 적었음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4) ‘4김 회담’과 ‘남북지도자협의회’ : 남한 민족주의자들의 주도


연석회의가 폐회된 후 김구 등의 강력한 요구로 지도자회담이 열렸다.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의 ‘4김 회담’이 4월 26일, 30일 두 차례 열렸으며, 남북 지도자 15인(남한 민족주의 8, 남한 좌익 3, 북한 좌익 4)으로 구성된 ‘남북지도자협의회’가 결성되어 ‘4김 회담’과 병행되었다. 지도자협의회 역시 애초에는 좌익이 우세한 비율로 제안되었으나, 김구 등이 문제제기하여 민족주의자와 좌익의 비율을 조정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다.


지도자협의회에서는 김규식이 제안했던 ‘남북협상 5원칙’을 의제로 삼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이 의제를 기반으로 논의하여 공동 코뮤니케를 발표하기로 합의했다. 회합 과정에서 각종 이견들이 표출되었다. 회담의 목적과 관련해서도 김일성의 경우 단선 반대에 주력하자고 주장한 반면 김규식은 ‘통일조선을 창조하는 미래의 초석이 될 남북연합기구의 창설’까지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이견들이 조정된 후 발표 형식에 대해서도 의견을 조율했다. 발표형식은 4김 회담에서 ‘공동성명서’를 작성한 후 지도자협의회에서 통과시키고, 마지막으로 남북의 정당․사회단체 대표자들이 서명하는 방식으로 결정되었다. 4김 회담에서 합의한 내용을 ‘결정서’와 같이 남북 정당․사회단체의 명의로 발표하기로 한 것이다.


‘공동성명서’의 핵심적 내용은 ① 미소 양군 철수, ② 내전 방지를 위한 지도자들의 확인, ③, 전국총선에 의한 통일국가 수립, ④ 남한의 단선 단정 반대로 요약될 수 있다. ‘결정서’에서는 미국을 ‘제국주의’라 지칭하며 규탄했지만, 이 ①항에서는 미국에게 ‘정당한 제의’를 수락하여 군대를 철수하고 통일국가 수립에 협력하라고 촉구하고 있다. 초안에서는 북한의 민주개혁을 찬양하는 내용이 삽입되어 있었으나 민족주의자들의 반대로 삭제되었다. ②항의 내전 방지 조항은 사실상 북한의 남침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조항이었다. ③항은 전국선거에 의한 헌법 제정과 통일정부 수립을 제창한 것으로, 당시 북한에서 제정된 헌법을 부정하는 조항이었다.


공동성명서 작성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부분은 미국에 대한 태도 문제였다. 북한과 좌익은 미국을 ‘제국주의’라 부르면서 비난했지만, 남한 민족주의자들은 미소관계에서 ‘평등원칙’을 강조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동성명서 작성과정에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합리적인’ 수준에서 민족자주의 원칙을 천명할 수 있는가가 문제였다. 결국 김일성은 김구․김규식이 주장한 ‘평화적 외교원칙’을 수용함으로써 주위를 놀라게 했다. 남한의 두 김 씨가 북한의 두 김 씨를 적극적으로 설득한 성과였다.


‘결정서’와는 달리 ‘공동성명서’는 남한 민족주의자들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합의를 이룬 진정한 ‘쌍무적 공동성명’이라고 볼 수 있다. ‘결정서’가 남한에 공개되었을 때에는 단정세력은 극렬히 반발하고 임정․중도파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공동성명서’의 경우에는 남북협상을 지지했던 좌우익 대부분이 지지를 표명했다.


각주 1) 민주기지론

 

민주기지론은 역사적으로 북한의 대표적인 통일전략 중 하나로 인정받아왔기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어왔으나, 정확한 개념과 역사적 형성 과정 등에 대해서는 여러 논란이 있다. 민주기지론의 성격에 관해서는 애초부터 분단을 획책하기 위한 노선이라는 견해, ‘선개혁 후통일’전략으로서 조만식과의 통일전선을 명시적으로 거부한 노선이라는 견해, 분단을 의도하지는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분단을 고착화시킨 노선이라는 견해, 공산주의 혁명 이론 중 하나인 ‘혁명근거지론’을 시의적절로 적용한 노선이라는 견해 등 다양한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기지론의 태동에 대해서도 이견이 있는데, 적어도 1945년 10월 10일 북조선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들이 모여 개최한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원 및 열성자 연합대회'에서 이론의 시발이 되는 주장은 제기되었다. 김일성은 이 자리에서 직접 ‘민주기지’를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미․소군이 분할 진주한 현 정세에서 북조선지역에서 가능한 민주개혁을 먼저 추진하여 통일전선을 ‘만방’으로 강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이 시점에서 통일전선은 흔들리지 않았고, 김일성 역시 조만식과의 합작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보면 최소한 민주기지론을 ‘분단획책노선’으로 단정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김일성은 통일전선의 강화라는 측면에서 민주기지노선을 고민했다. 즉 민주기지론은 기본적으로 통일을 전제로 한 국가건설노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민주기지가 현재 북한이 정의하는 공식적인 통일노선으로 확립되는 첫 계기는 1948년 3월 열린 북로당 2차 당대회였다. 즉 군대를 창설하고 헌법 초안을 발표하는 등 정부 수립에 박차를 가하면서 남북협상을 모색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민주기지론이 공식적인 통일노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민주기지론은 분명 북한 주도의 통일을 모색하고 있기는 하지만 무력통일과 적화통일을 전제하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일각에서 민주기지론을 분단을 고착화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이론이라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지만, 역사적인 형성과정을 살펴보았을 때 기본적으로 통일의 관점에서 북한의 적극적 역할을 모색한 이론이되, 평화와 비평화 노선을 복합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통일정책이라고 봐야 한다. 참고로 북한에서 공식적으로 정의하는 민주기지론의 개념은 다음과 같다.


민주기지란 혁명이 진행중인 나라에 있어서 다른 지역보다 먼저 혁명에 성공하고 혁명 정권이 수립되어 민주개혁이 이루어지고, 장차 전국적 범위에서 혁명의 과제를 수행할 수 있기 위한 근거지가 되는 지역을 말한다. 공화국 북반부는 전국적 범위의 반제 반봉건 민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민주기지이다.(<대중정치용어사전>, 1977, 평양:조선노동당출판사)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1) - 해방 직후의 김구와 임정법통론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2) - 이승만의 단독정부론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3) - 김구와 이승만의 갈등과 결별 : 민족국가 건설 구상의 균열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4) - 남북협상의 추진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5) - 남북협상의 경과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6) - 남북한 단정 수립과 김구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7) - 1949년, 김구의 마지막 노선 ①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8) - 1949년, 김구의 마지막 노선 ②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9) - 제헌국회 소장파의 부침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10) - 김구의 암살과 그 배경 ①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11) - 김구의 암살과 그 배경 ②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12) - 김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①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完) - 김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②


 


핑백

덧글

댓글 입력 영역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자치준비모임

Photo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자치준비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