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2) - 이승만의 단독정부론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2. 이승만의 단독정부론


1)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을 평가하는 시각


해방전후사에서 단독정부론은 뜨거운 감자다. 작년 근현대사교과서 파동이 불거졌을 때, 뉴라이트의 문제제기 중에는 금성교과서가 북한에서 임시인민위원회가 1946년 2월에 수립되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적시하지 않은 채 1946년 6월 있었던 이승만의 ‘정읍 발언’을 부각시킴으로써 이승만을 폄하했다는 내용이 있었다. 최소한 이승만은 북한보다는 늦게 단정 수립을 주장했으므로 그에게만 단정 수립의 책임을 물어서는 안 된다는 논지이다.


예전에는 이승만이 지방을 순회하던 중 1946년 6월 3일 정읍에서 한 발언이 단독정부론의 시초라고 이해했다. 미국과 소련은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합의한 바에 따라 한국의 통일적 독립정부 수립 절차를 협의하기 위해 1946년 3월 1차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했다. 그런데 1차 미소공위는 정부 수립 문제를 협의할 한국인 정당․사회단체를 어떤 방식으로 참여시킬 것이냐에 관한 문제를 둘러싸고 대립을 거듭했다. 초반에는 미소공위가 성과를 거둘 것이란 기대도 있었으나 5월 즈음 되면 결렬 전망이 나오기 시작했다. 기존의 연구에서는 이승만이 1차 미소공위의 결렬을 예상하고 정부수립 논의에서 이슈를 선점하기 위한 전략으로 암중모색하고 있던 단독정부론을 공개적으로 제기했다고 평가해왔다.


정읍 발언 중 이승만의 모습(출처)



그러나 최근의 연구에서는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이 해방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원을 지니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승만의 단독정부론은 미국의 대한정책과 연관이 깊다. 이승만은 귀국 당시부터 맥아더, 하지 등과 시국에 대한 긴밀한 협의를 거쳤는데, 정부수립 구상 역시 그러했다. 미군정은 해방 직후 ‘정무위원회(政務委員會, Governing Commission)’ 구상 등을 통해 남한만의 과도정부를 수립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미군정은 바로 이런 과도정부 수립 구상을 위해 이승만을 극진히 모셔오고 김구의 귀국도 승인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해방 이전 미국과 교섭하는 과정에서 강렬한 반소반공주의를 표방하면서 미국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미국무부는 이승만이 반공 성향이 너무 극단적이라며 경계한 반면 맥아더는 호의적이었다. 이승만은 미군의 호의 속에 화려한 모양새로 귀국했다. 귀국 전에 도쿄에 들러 맥아더와 긴밀하게 정계통합 등 시국에 관한 논의도 했다. 이것은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기록이다. 단독정부론 역시 강렬한 반공성향을 가진 이승만과 미군이 찰떡궁합 이심전심으로 모색했던 것이다.



2) 이승만과 단독정부론


해방 직후 45년 연말에 이르기까지 남한의 정계통합이 실패로 귀결됨으로써 미군정과 이승만이 모색한 남한만의 과도정부 수립 구상 역시 일단 실패로 돌아갔다. 게다가 당시의 정국은 감히 단독정부론을 입 밖으로 공공연히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었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남한만의 과도정부를 수립할 필요성에 대해 우회적으로 의견을 밝혔지만, 여론이 관심을 보이면 곧 ‘오해’였다며 부정했다.


단독정부론은 1차 미소공위의 결렬로 인해 비로소 등장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미군정과 이승만의 단독정부 구상이 미소공위를 흔들어 좌초시켰다는 역사상이 더욱 진실에 근접할 것이다. 하지는 미소공위를 통해 통일정부를 수립하여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미국무부의 정책에 회의를 품고 있었다. 하지는 비록 미국무부의 지령을 받아 미소공위를 준비했지만, 하지를 비롯한 미군정 관료들의 반공주의 성향은 미소공위를 지지부진하게 하는 주요 요인들 중 하나였다. 게다가 김구와 이승만이 주도한 반탁운동 역시 미소공위를 흔드는 커다란 장애였다. 미소공위를 교착에 빠뜨린 가장 큰 문제가 반탁운동에 참여한 우익 단체를 협의 대상에 포함시킬 것인가에 관한 갈등이었다. 남한의 반탁운동은 소련에게 있어 매우 적당한 공격거리였고, 미국에게 충분히 압박을 주는 문제였다.


3) 이승만의 방미 외교와 단독정부론 선전


1946년 중반 이승만과 우익 일각에서 제기한 단독정부론(단정론을 ‘처음으로’ 제기한 ‘한국인’은 사실 이승만은 아니고 김규식이었다)은 1차 미소공위의 결렬과 맞물려 단숨에 뜨거운 감자로 떠올랐고, 후폭풍이 되어 밀어닥쳤다. 좌익은 물론이고 김구 역시 단정 구상을 맹렬히 비판했다. 대다수의 우익 단체 역시 비판에 가담했다. 이승만을 옹호하는 집단은 한민당 등 극소수일 뿐이었다. 이승만은 국내 여론의 이러한 비판보다는 미국의 동태에 관심을 기울였다.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미국은 미국무부의 주도로 이승만과 김구 같은 ‘극우 인사’를 배제하고 ‘중도 우익’을 중심으로 한 좌우합작을 통해 과도정부를 수립하여 이후에 있을 2차 미소공위를 대비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미군정은 새로운 과도정부 구상을 집행할 책임을 떠맡은 상황에서 새로운 구상이 이승만의 단정론과 결합하는 것을 꺼려했고, 공개적으로 이승만의 단정론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의중을 파악한 이후에는 단독정부론을 다시 부정하고 임정법통론으로 물러섰다.


이승만은 1946년 중반 이후 정국의 중심으로 부상한 좌우합작운동을 견제했다.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을 통해 남한 민중의 지지를 받는 우익 중심의 과도정부를 수립하고자 했던 미군정은 사사건건 좌우합작운동을 흔들어대는 이승만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결국 미군정만 붙들고 앉아있다가는 정국의 주도권을 놓치게 될 것이라 여기고 1946년 12월 방미 외교를 떠나게 된다. 방미 외교는 미군정에게 견제를 당하며 정국에서 소외당할 위기에 처했던 이승만이 내린 결단이었는데, 운은 이승만의 편이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남아있던 지지 세력을 활용하여 자신의 단독정부론을 미국 정가에 홍보했다. 실제로는 커다란 성과가 없었으나, 이승만은 자신이 미국무부의 관료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합의했다고 왜곡선전하며 존재감을 과시하려 했다. 그러던 중 운이 따랐다. 1947년 3월 12일 트루먼 독트린이 발표된 것이다. 이승만은 마치 트루먼 독트린을 자신이 주도하여 이끌어낸 것처럼 선전했다. 또 대한 원조 정책이 발표되자 그것 역시 자신의 공이라고 선전했다. 모두 왜곡이었다. 이승만의 방미 외교는 미국의 대한정책을 바꾸지 못했지만, 최소한 왜곡선전을 통해 자신의 명성을 높이는 데는 성공했다. 남한에서 이승만의 인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승만은 1947년 4월 귀국하면서 곧바로 남한에서 조기 총선거를 실시해 단정을 수립해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주장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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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승만의 남조선 단정론 2009/06/26 09: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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