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이 글을 쓰기 시작하는 날은 6월 25일이다. 한국전쟁 발발 59주년이 되는 날이다. 오늘 역사를 다루는 글을 쓴다면 응당 한국전쟁에 관련된 주제를 잡아야 할 테지만, 본인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6월 26일에 관련된 글이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안두희의 테러의 의해 목숨을 잃었다. 2009년 6월 26일은 그 60주년이 되는 날이다.
김구를 다룬 글은 진작 쓰고 싶었다. 노무현 서거 때문이다. 노무현이 죽음을 맞는 과정, 그리고 노무현에 대한 예상보다 훨씬 뜨거운 추모열기 등은 60년 전 김구가 뜻밖의 암살을 당했을 당시의 정경과 정말로 비슷하다. 단순히 인상만 비슷한 것이 아니라 두 지도자의 죽음을 둘러싼 정치사회적 구조가 비슷하다. 참고로 정운현 님이 김구와 노무현의 죽음을 비교한 글을 쓰신 바 있다. 읽어볼만하니 참고해보자. (노무현 영정에 백범 선생이 투영되는 까닭 - 정운현 블로그)


작년 제헌국회 소장파를 다룬 졸업논문을 쓰면서부터 직간접적으로 김구에 관한 공부를 조금씩 해왔다. 최근 뉴라이트가 이른바 '이승만 국부론'을 떠들고 다니는 바람에 이승만의 라이벌이었던 김구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 조금씩 높아져가고 있다. 본인 역시 이러한 시세에 부응하여 김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던 터다. 10만원권을 둘러싼 갈등을 보고나서는 뉴라이트의 김구에 대한 적대심도 확인할 수 있어 더욱 호기심이 강해졌다. 왜 뉴라이트는 김구를 미워하는가. 적지 않은 의미를 내포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김구에 대해 공부한 편린들을 새삼 블로그에 펼쳐놓으려 하는 이유는 김구라는 지도자가 남긴 유산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노무현의 죽음을 접하면서 김구의 죽음에 대해 더 한층 깊이 고민해보게 된다. 그래서 김구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잡고 6월 26일을 기념하는 포스팅을 해보고자 한다. 이제 계속 이야기하겠지만 김구의 죽음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해방전후사의 행적에 집중할필요가 있다. 김구의 죽음에는 이승만이 개입되어 있고, 이승만과의 본격적인 갈등이 형성된 공간이 해방/점령공간이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개항기부터 시작하여 식민지시기와 해방/점령공간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 때문에 다양한 분석과 평가가 가능하겠지만, 여기서는 해방 후의 행적에 집중하고자 한다. 그리고 해방 후의 행적을 따라가는 기준은 "김구는 왜 죽게 되었는가?"라는 궁금증이다. 김구와 이승만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인 문제는 “어떤 민족국가를 건설할 것인가?”에 관한 이견이었다.
1. 해방직후의 김구와 임정법통론
김구는 해방/점령공간에서 일관되게 ‘임정법통론’, 즉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여 독립정부를 수립해야한다는 국가건설구상을 견지했다. 1945년 9월 3일 임시정부는 귀국에 앞서 <당면정책>을 발표했는데, 여기서 임정법통론의 요체가 잘 드러난다. 임정법통론의 주요 내용은 1) 임시정부의 정권 접수, 2) 민족영수회의를 통한 과도정부 수립, 3) 전국적 보통선거에 의한 정식정부 수립의 세 단계 국가건설 과정이다. 김구와 임정계 인사들은 처음부터 임정을 위주로 한 독립정부를 구상했는데, 그 구상은 당연히 38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의 구상과 충돌했다.
미군정은 처음에는 임정 인사들의 귀국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미군정은 이승만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고, 이승만은 맥아더와 하지의 후원에 힘입어 해방직후 38선 이남에서의 정계통합에 나서고 있던 상황이었다. 해방 직후에 이승만은 좌우익으로부터 모두 지도자급 정치가로 인정받고 있었지만, 곧 이승만이 편협한 반공주의 행보를 강화하면서 좌익의 견제를 받기 시작했다. 미군정은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정계통합에서 임정이 ‘스튜 요리에 필요한 소금’(미군정 사령관 하지의 표현)이 될 수 있으리라 보고 임정 인사들의 귀국을 승인했다. 김구와 임정 인사들은 해방된 지 3개월여가 지나서야 조선 땅을 밟을 수 있었다.
미군정의 예상은 빗나갔다. 임정 인사들이 귀국하는 시점에서 이승만을 중심으로 한 정계통합은 거의 실패한데다가, 조선인들의 임정에 대한 지지는 미군정의 예상보다 더욱 뜨거웠다. 김구는 특유의 추진력을 발휘하여 임정법통론에 의거한 정부수립 구상을 행동으로 옮기려 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여운형을 비롯한 중도파와 좌익이 건설했던 인민공화국을 부정했듯이 임시정부 역시 부정했다. 김구의 임시정부는 여운형의 인공처럼 상당한 지지를 얻고 있었지만 미군정의 압박으로 발이 묶였다. 해방 직후 1945년 연말까지 미군정은 이승만과 김구를 적절히 이용하여 우익 중심의 정계통합을 이뤄 미군정의 입맛에 맞는 ‘한국인 자문입법기구’를 만들려 했지만, 이승만의 편협한 이념투쟁과 김구의 ‘무대뽀’ 독립정부 수립운동으로 인해 미군정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김구는 일본이 패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기쁨에 앞서 한탄과 우려를 나타냈다. 조선인의 힘으로 독립을 이루어야 비로소 진정한 해방을 맞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김구는 전쟁 참가를 위해 미국과 교섭하면서 미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38선을 경계로 미소가 분할 점령한 상황에 대해 김구는 우려했다. 조선인의 힘에 의한 독립정부 수립이 순탄치 않을 것을 예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구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외골수의 강직한 정치지도자였고, 귀국한 이후 미군정의 정책에 발맞추어 국가수립을 도모한다는 유연한 정책은 채택하지 않았다. 해방된 조선에서 독립정부의 수립은 오직 조선인의 힘만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굳게 여겼고, 그 방책은 임정을 위주로 한 정계통합이었다. 그에게 있어 미군정의 정책적 의도는 별무관심이었다. 그 점이 일본의 맥아더와 미군정의 하지, 그리고 미국 본국의 정치적 흐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노회한 전략을 수립했던 이승만의 동향과 가장 큰 차이였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삼상회의 결과에 대한 엄청난 오보가 조선사회를 강타하면서(각주 1) 이른바 ‘신탁통치 파동’이 조선을 뒤흔들게 된다. 이승만은 미국 정책결정자들 사이의 노선 대립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미 국무부는 미소 협조를 통한 한반도의 통일적 정부 수립을 낙관하고 있었던 반면 맥아더와 하지 등 군부는 미소 협조와 신탁통치의 효과에 회의적이었다. 군부는 조선에서 좌익의 영향력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경계하고 있었고, 미소협조에 의해 통일정부가 수립된다면 조선은 결국 공산화될 것이라고 여겼다. 이승만은 이러한 미국의 입장을 이해하면서 반탁운동에 참가했다. 이승만에게 있어 반탁운동은 38선 이남에서 좌익을 억제하고 우익의 복귀를 추동하는 효과적인 전술로 여겨졌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이었다.
김구의 경우에는 단순했다. 그는 미국의 신탁통치 정책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삼상회의 결과에 대해 놀라지는 않았지만, 당연히 반대해야 한다는 입장은 분명했다. 미소협조에 의한 정부수립 구상은 임정법통론과 명백하게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김구는 “새 출발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천명하고 반탁운동의 전면에 나섰다. 임정 세력은 대규모의 반탁시위를 조직하는 한편, 1945년 12월 31일 군정 산하기관들을 임정이 접수한다는 포고문을 발표함으로써 ‘작은 쿠데타’를 감행하기도 했다. 당시 서울 시내 경찰서장 10명 중 8명이 임정의 포고에 응했다는 기록을 보면 당시 반탁운동에서 임정이 보여준 영향력이 대단했음을 짐작케 한다.(각주 2)

임정의 ‘작은 쿠데타’를 접하고 하지는 격분했다. 그는 김구를 불러 반탁운동을 중지할 것을 명령했다. 김구가 뻗대자 하지는 “다시 한 번 나를 기만하면 죽여버리겠다”며 극단적인 언사까지 던졌다. 김구는 굴하지 않고 자살소동을 벌이며 저항했다. 결국 김구는 반탁운동이 미군정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을 대외적으로 천명하고 시위와 파업 중지를 지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 ‘작은 쿠데타’를 계기로 미군정은 김구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철회해 버렸다. 이후로도 미군정은 김구에게 우호적인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 미군정은 이후로도 우익 중심의 과도정부 수립 구상을 꾸준히 추진하지만, 그 대상은 김구와 같은 ‘극우’가 아니라 김규식과 같은 ‘중도 우익’이 되었다.
* 2부에서 계속 - 이승만의 단독정부론과 1947년의 정세를 다룰 예정.
각주 1) 모스크바 삼상회의와 신탁통치 파동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3국의 외상이 회담을 가졌다. 전후 처리에 관한 미해결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주로 유럽문제가 논의되었지만, 한국문제도 논의되었다. 미국은 소련에게 ‘신탁통치안’을 제안했다. 주요 내용은 1) 남북간 통일 행정부의 조속한 수립, 2) 미․소․영․중 4국에 의한 5년간의 신탁통치(5년 연장 가능)였다. 소련은 미국의 제안을 검토한 후 ‘선 정부수립, 후 신탁통치’를 골자로 하는 역제안을 제출했다. 최종안은 소련의 입장이 거의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최종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친일청산을 위해 즉각적으로 통일적 과도정부(조선민주주의임시정부라고 표기됨)를 수립한다, 2) 이를 위해 남조선의 미군과 북조선의 소련군이 공동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의 정당․사회단체들과 협의한다, 3) 공동위원회는 과도정부와 정당․사회단체들과 함께 조선의 독립과 사회적 안정을 실현할 방책을 마련한 후, 5년 이내를 기한으로 하는 4국 신탁통치(후견)의 협정을 작성한다.
미국과 소련이 상정한 신탁통치 개념은 매우 달랐다. 미국의 제안은 정부수립 이전 국제민간행정기구 관리 하의 신탁통치를 의미했지만, 최종안(소련의 제안)은 먼저 조선인이 주체가 되는 과도정부를 수립한 후 협의를 거쳐 4국 협정에 의해 실시되는 신탁통치를 의미했다. 미국의 신탁통치가 말 그대로 ‘신탁통치’였다면, 최종안의 그것은 ‘후견’의 성격이 강했다. 미국은 비록 최종안 도출에서는 소련에게 양보했지만, 미소공위의 운용 여하에 따라 충분히 친미적인 정부를 수립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모스크바에서 이 결정이 공식적으로 발표된 시각은 12월 28일 오후 6시였다. 그런데 하루 전인 12월 27일에 동아일보에 모스크바 결정에 관한 기사가 났다. 그런데 이 기사내용이 엄청난 오보였다. 그 기사의 제목이 이랬다. <소련은 신탁통치 주장, 미국은 즉시독립 주장, 소련의 구실은 38선 분할 점령>. 미소의 입장을 정반대로 쓴 것이다. 이 오보는 미군정과 이승만 측의 의도된 공작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동아일보의 오보는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각 진영은 오보가 나간 다음날부터 성명을 발표해대기 시작했고 반탁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어갔다. 미국과 교섭한 경력이 있는 이승만과 김구는 미국이 한반도에서 신탁통치를 기획하고 있다는 정황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보가 나간 이후에도 흐트러짐 없이 대중의 반탁 열기를 추동하여 반탁운동을 조직해나갔다. 그러나 좌익은 신탁통치 문제에 관해 생소한 편이었다. 좌익은 오보가 나간 직후에는 ‘인민공화국 사수’를 외치며 반탁 입장을 표명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모스크바 결정 총체적 지지’로 급선회했다.
대중은 좌익의 혼선을 바라보며 의아해 했다. 어쨌든 해방 직후의 상황에서 다시금 외세의 지배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우익의 선전은, 그 지배의 성격을 따져보기도 전에 대중의 마음을 뒤흔들었고, 반탁운동은 맹위를 떨치게 되었다. 반탁운동은 수세에 몰려있던 친일세력에게 기회를 부여했다. 친일세력은 다시금 광장으로 나와 ‘반소반공’을 외치는 ‘애국자’로 행세했다. ‘반민족적 친일청산’이 시대정신이었던 해방 직후의 조선사회는 동아일보의 '의도된' 오보를 계기로 한 반탁운동으로 인해 혼란스러운 좌우대립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각주 2) 김구의 '대북 타격정책'
1946년 초반 우익 반탁진영은 반탁운동의 일환으로써 ‘대북 타격정책’을 실행하기도 했다. 이승만도 관여하기는 했으나, 김구와 임정세력이 주도했다. 특히 신익희가 조직한 ‘정치공작대’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정치공작대는 신익희가 독자적으로 조직한 정보기구이었으나 임정의 내무부와 깊은 연계를 맺고 있었다. 정치공작대의 공작은 김구의 승인 하에 이루어졌다.
정치공작대는 운동원을 북으로 파견하여 각종 정보를 수집함과 아울러 반탁 조직을 결성하는 역할, 주요 공공기관을 방화하여 혼란을 부추기는 역할 등을 수행했다. 특히 1946년 2월 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된 이후에는 중요 요인의 암살에 집중했다. 대표적인 사례로 1946년 3월 1일 평양역 앞에서 열린 3.1절 기념행사에 수류탄을 투척한 것을 들 수 있다. 이외에도 최용건, 김책 등 주요 요인의 집을 습격하기도 했다. 이러한 테러활동은 1946년 중반을 경과하며 수그러들었다. 그 이유는 임정이 북한의 임시인민위원회와 맞부딪치기는커녕 남한에서조차 미군정과 이승만에게 견제당해 위축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1) - 해방 직후의 김구와 임정법통론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3) - 김구와 이승만의 갈등과 결별 : 민족국가 건설 구상의 균열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4) - 남북협상의 추진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5) - 남북협상의 경과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6) - 남북한 단정 수립과 김구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7) - 1949년, 김구의 마지막 노선 ①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8) - 1949년, 김구의 마지막 노선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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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12) - 김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①
백범 김구 60주기 기념 포스팅 (完) - 김구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②




덧글
나아가는자 2009/06/26 00:36 # 답글
잙 읽었습니다. '작은 쿠데타'이야기는 처음 듣는군요. 그런데, 이해가 안되는건 당시 경찰 고위직의 80%가량이 식민 경찰에서 유래했는데, 어떻게 경찰서장들이 동조했었을까...제 추측이지만, 아마도 당시에는 임정에 대한 호의적인 여론이 그들마저도 움직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만.
자유로픈 2009/06/26 01:10 #
'작은 쿠데타'는 90년대 이후 나온 최근의 연구성과들에서는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쿠데타는 김구가 직접 지휘한 것이 아니라 임정 내무부장을 맡고 있던 신익희가 정치공작을 벌여 주도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김구는 신익희가 세운 계획을 승인했습니다. 신익희는 47년에도 쿠데타 시도를 한 번 더 하게 됩니다. 암튼 해방전후사를 공부하다보면 의외로 김구와 임정의 활동에 대해서는 활발한 연구가 되어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45년 해방직후에는 임정에 대한 지지가 꽤 컸습니다. 그리고 좌우대립구도가 전면화하기 이전 시기였었죠. 우익이건 좌익이건 친일청산을 위한 정계통합을 외쳤던 시기였습니다. 이때에는 한민당의 공식입장 자체가 '임정봉대'였고요. 경찰은 46년 좌익의 봉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맛이 가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남한 우익 내부의 권력투쟁에서 이승만이 김구를 누르고 점차 우위를 확보해나가기 시작하는 흐름과 연관이 있습니다. 47년에 이르면 우익의 좌익에 대한 테러가 전국을 휩쓸기 시작하고, 경찰은 여기에 동조하며 민중 탄압을 본격화하죠. 마치 요즘 한국사회처럼요...
나아가는자 2009/06/27 01:00 #
좋은 답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