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을 진정으로 추억하기 위하여 同時代史를 헤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의 세상(허지웅씨 글 트랙백)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노무현

토요일 오전에 늦잠을 자다가 동생의 전화를 받았다. 동생은 다짜고짜 너무 심란해서 전화했다고 한다. 대체 영문을 모르겠어서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오히려 당황해한다. 노무현이 자살했다는데 모르느냐고 반문한다. 정치에 관심있는 오빠는 무슨 실시간으로 시사정보를 다루는 줄 아나 보다.

암튼 무거운 짐을 벗은지 1년여 만에 더욱 무거운 짐을 벗으려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한민국 전 대통령은, 오늘 많은 민초들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다.

허지웅(존칭 생략)의 글을 트랙백한 이유는, 나 역시 그의 죽음을 접하자마자 똑같은 감상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검찰의 공격은 비록 가혹하기는 했으나, 대한민국의 여느 정치인이라면, 더구나 대통령까지 해 먹은 중량감 있는 정치인이라면 약삭빠르게 검찰에 대응해가며 자신에게 유리한 길을 모색해 나갈 터였다. 나는 노무현을 당연히 그런 부류의 정치인, 즉 정치를 하면서 필연적으로 느껴야 하는 부끄러움을 적당히 추스려가며 명분과 실리를 취하려 하는 '보통' 정치인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과는 달리 그는 부끄러움을 이겨내지 못했다.

뉴스특보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수 십년 정치를 하면서, 그것도 한국정치판에서 살아오면서 그는 어째 뻔뻔함을 유지하는 능력 조차 키우지 못했던 걸까. 어떤 이유로 키울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키울 필요가 없었던 걸까, 혹은 키우지 않으려 발버둥쳐 왔던 것일까.

지사(志士)적 정치가 노무현

강준만은 2008년 노무현 정권의 성격을 분석하는 <아웃사이더 콤플렉스>(개마고원)란 저서를 냈는데,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소수자-외부자의 위치에서 기득권에 저항하기 위해 비타협적인 자세를 고수하는 태도를 정작 기득권을 잡은 후에도 견지하는 심리를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라 이름짓고 한국사회의 진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 태도라 하여 비판하고 있다.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는 저자가 지적하듯이 비상식적인 기득권의 횡포에 신음해왔던 한국근현대사의 특성으로 인한 산물일 터인데, 그래서 일제 치하에서 독립운동가들이 지녔던 태도와도 유사하다. 이른바 흔히 '지사(志士) 정신'이라 부르는 것이다.

지사정신은 거칠게 풀이하자면 명분과 실리 중에서 명분을 더욱 중시하는 태도를 말한다. 어떤 상황에서건 옳은 건 옳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태도는 정치 영역에서는 대개 실리를 해치는 결과를 발생시킨다. 그래서 지사정신을 지닌 정치인은 외골수로 통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가 '민족지도자'로서 존경하는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이러한 지사정신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해방 이후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정치에 뛰어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독립운동을 했던 '민족지도자'들의 지사정신을 논한 본인의 글)

극우반공독재가 횡행하는 한국현대사에서 민초들이 지사정신을 가지고 독재에 저항하는 정치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가뭄에 콩나듯 나타날 때마다 민초들은 성원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테면 50년대의 조봉암, 70~80년대의 김영삼, 김대중이 그러한 정치인들이었다.

돌이켜보면 노무현 역시 지사정신을 유감 없이 발휘해온 정치인이었고, 정치개혁이 시대정신으로 떠오른 21세기 초엽의 시세를 잘 타서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아 한순간에 대통령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민주화 이후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들인 김영삼과 김대중은 모두 민주화가 시대정신이었던 시기의 지사적 정치인들이었다. 민주화 이후의 한국사회에서 어떤 새로운 시대정신이 요구되었던 시기, 노무현은 그 어떤 시대정신을 가장 잘 반영하는 지사적 정치인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러 저러 해도 국민들은 강한 명분과 도덕성을 가진 지도자를 선호했고, 21세기 초엽의 시대상황에서 노무현을 그 시대정신의 담지자로 인정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노무현을 진정으로 추억하기 위하여

노무현은 과연 그 '시대정신'을 잘 구현했는가. 우리는 그 문제에 대해서 여전히 논쟁 중이고, 심지어 현재 한국사회가 지향해야 하는 '시대정신'이 무엇인가에 관한 문제를 가지고도 논쟁 중인 상황이다. 그래서 노무현과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는 매우 복잡하다. 다양한 층위에서의 평가지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여정부가 지향한 시대정신은 무엇이었는가. 그리고 그 시대정신을 제대로 구현했는가.

당장 우리 앞에 놓인 엄혹한 시대를 극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참여정부의 공과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과제를 가지고 있었으나, 노무현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는 당장 참여정부의 공과를 냉정하게 평가하기는 어려워졌다. 아마도 참여정부 시기는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에 '역사적인 견지'에서 평가되어야 하리라.

우리가 당장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를 하기 힘들어진 이유는 단순히 우리가 노무현의 죽음에 대해 감정적인 충격을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노무현의 죽음이 그 형태가 어떠했든지 참여정부를 낳고 참여정부가 지향했던 '시대정신'이 총체적으로 부정되고 있는 현재의 '반동(反動)'을 극명히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현재의 '시대정신'이 그 정체가 무엇인지 논쟁 중이라고는 했지만, 그 논쟁에 관심을 가진 우리들은 어떤 입장을 가졌든 역사가 후퇴하고 있다는 인식만은 같이 하고 있다.

노무현은 유서에서 '원망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는 노무현이 좋아서가 아니라 노무현이 대변하고자 했던 '시대정신'이 좋기 때문에 원망할 수밖에 없다. 시대정신의 대변자를 자임했던 그의 지사정신이 좋아 대통령으로 뽑았었는데, 이제 그 지사정신으로 인해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그의 죽음 앞에서 우리 역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그는 아마 전혀 바라지 않았겠지만, 그는 그가 뛰어내리기 위해 섰던 낭떠러지로 우리 역시 몰아넣고 만 것이다.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가 이제 '역사적 평가'만이 가능해졌다는 이야기는 결국 참여정부의 정신이 다시금 현재로 불려나왔다는 이야기이다. 앞으로 한국현대사에서 참여정부에 대한 평가는 2008년 2월까지의 시기로 끝나지 않고 앞으로의 우리 행동에 의해 완성될 것이라는 이야기이다. 참여정부를 좋아한 사람이든 싫어한 사람이든, 대통령 노무현에 대해 지지했던 사람이든 비판적이었던 사람이든, 현재의 반동을 저지하고 진보를 이루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죽은 '부끄러움에 너무나 민감했던' 지사적 정치가의 죽음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져야할 책임은 서로 긴밀히 연관된 두 가지 과제를 이루는 일일 터이다. 하나는 기득권에 좌고우면하지 않고 서민을 위해 가시밭길을 걷고자 하는 지사정신을 지닌 지도자를 우리 힘으로 육성하는 것이다. 강준만은 아웃사이더 콤플렉스가 한국사회의 진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았지만, 나는 여전히 지사적 정치가의 존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노무현은 그동안 겉으로 보인 언행과 속마음이 달랐다고 많이 비판받았지만, 그래도 마음 한편에서 부끄러움을 계속 지녀왔던 정치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는 여전히 그런 정치인이 필요하다.

다른 하나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에 대한 응징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접한 검찰과 청와대의 당황을 보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들의 관점에선 '고작 그 정도의 공격'으로 노무현이 자살을 선택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터이다. 노무현의 죽음을 접하며 심란해하고 있는 우리들 다수 시민들은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들이 바로 반동의 주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그들을 쫓아내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노무현의 죽음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 참여정부의 공과를 평가할 수 있을 터이다. 그리고 참여정부보다 더 나은 방법으로 올바른 시대정신을 구현할 지도자를 만들어내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노무현을 '이러 저러한 한계가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한국현대사에서 보기 드문 올곧은 정치인이었어' 하는 식으로 추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보론 - 민주당의 향후 행보에 관해

민주당은 앞으로 노무현의 죽음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부심할 것이 틀림없는데, 잘못하면 자기 무덤을 팔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민주당은 과연 노무현을 탄생시킬 수 있었던 왕년의 저력을 되찾을 수 있을까? 최근의 행보를 보면 그리 신뢰가 가지 않는다. 민주당은 노무현의 죽음에 임하여 반면교사의 성찰에 힘써야 한다. (본인의 관련 글-<민주당, 왕년의 저력을 다시 발휘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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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를 읽다가 여기 들렀네요. 2009/06/01 13:00 #

    먼저 좋은 글 고맙습니다. 많은 참고가 되었네요. 노무현 대통령 재임시 한나라당과의 대연정 발언 이후 개인적으로 이건 정말 아니다 싶어 참여정부에 대한 지지를 거두고 다시 예전처럼 정치세계와는 멀어졌던,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예전 기억이 이번 일로 많이 생각났습니다. '아웃사이더 콤플렉스'를 어제 읽다가 정말 그 내용이 너무 흥미진진해서 밤늦...... more

덧글

  • 루치까 2009/05/24 00:24 # 답글

    개인적으로 노무현에게는 실망도 많이 했지만, 또 그만한 기대를 걸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에 대한 지엽적인 비판은 제쳐두고, 한국 정치사에 있어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조명해야하지 않을까요. '노무현은 이명박에 비해서 민초들을 덜 죽였을 뿐이다'라는 일부 진보계층 사람들의 비아냥에 씁쓸해하면서, 일단은 자연인으로서 노무현을 추모하고 싶습니다. 다만 '추억'을 넘어 '역사'를 기록하는 앞으로의 과제에 소홀하면 안되겠지요.
  • 자유로픈 2009/05/24 20:41 #

    저도 한창 대학생 시절에는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노무현을 많이도 비난해댔던 바 있습니다만, 지금은 저 역시 루치까님이 언급하신 그런 '비아냥'에 동의하기가 힘드네요. 왜 그런지는 스스로 숙고 중입니다.;;;
  • leopord 2009/05/24 02:57 # 답글

    객관적인 비판도 평가도 오늘은 전 무리인 거 같습니다...
  • 은하 2009/05/24 16:49 # 답글

    2006년 같이 참여연대 보고서 쓰던 게 생각나네요. 아아
    시대정신을 구현하지도 못했는데, 담지자가 가 버리면 어쩌자는거야 ㅠ_ㅠ

    그래도 다음 진보진영의 후보들은 덜 지사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음흉하고, 정략적이고, 그렇지만 그래서 끝까지 살아남았으면.

    민주당은 이를 잘못 건드리다가는 엄청난 역풍을 맞겠지요.

    여러모로 착잡해서, 아무 것에도 손도 못 대고 있는 주말.
  • 자유로픈 2009/05/24 20:51 #

    진보적 정치인들이 그렇게까지 음흉하고 정략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없도록 우리들이 제대로 된 판을 만들어주려는 노력도 필요하겠지. 이를테면 노회찬이 삼성에 맞서 외로이 투쟁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길 수 있도록 해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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