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항쟁과 석탄산업 (2) - 1980년 4월 사북항쟁의 경과 한국사를 보는 시각

사북항쟁과 석탄산업 (1) - 한국 석탄산업과 탄광노동자

1. '사북항쟁'이란 명칭에 관해

1980년 4월 사북지역에서 동원탄좌 탄광노동자들이 주도하고 영세탄광기업 노동자들, 탄광노동자 가족들, 지역 중소상인들이 호응하여, 어용노조와 회사, 궁극적으로는 독재정권을 상대로 하여 강경한 저항권을 행사했던 이 사건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나는 이전 글부터 '사북항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연구보고를 쓰는 과정에서 이 사건에 항쟁이란 이름을 붙여도 좋다고 판단한 바 있기 때문이다.

사북항쟁은 현대사의 많은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주목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합의된 용어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대개 가치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용어로써 '사북사태', 혹은 '사북사건'이라 불러왔다. 공부과정에서는 보지 못했지만 아마 어떤 자료에서는 '폭동'이라 부르기도 할 것이다. 어떤 자료에서는 '사북 노동자 총파업'이라 표현되어 있기도 하다. 사북항쟁의 실질적 지도자였으며 이후 사북항쟁의 재조명을 위해 노력해 온 인물인 이원갑 씨는 '사북노동항쟁'이라 부른다.

사북항쟁을 실질적으로 이끌었던 이원갑 씨. (출처-한겨레)


사북항쟁의 성격을 살핀 가장 최근의 논문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 제출한 조사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80년 4월 사북에서 일어난 사건의 성격을 고찰하고 국가권력의 인권침해 여부를 따졌다. 진실화해위는 결론에서 이 사건의 성격에 대해 "노조 내부의 쟁투에서 탄광사회의 누적된 모순이 폭발한 지역 단위의 전면적 항거로 나아가게" 된 측면을 강조함으로써 '항쟁적 성격'을 인정하고 있다. 진실화해위는 공공성을 띤 보고서라 신중을 기해 이 사건을 '80년 사북사건'이라 명명했지만, 나는 진실화해위의 관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이 사건을 '사북항쟁'이라 부르기로 한다.


2. 동원탄좌와 어용노조의 횡포

사북의 탄광경제를 지배하던 기업은 단연 동원탄좌였다. 동원탄좌는 1980년 당시 정선군 일대에서 24개의 광구를 보유하고 연간 약 160만 톤의 석탄을 생산하여 전국 총생산량의 9%를 차지하고, 직원 수는 3,500여명에 이르는 국내 최대의 민영탄광기업이었다. 동원탄좌는 타 기업에 비해 유독 노동통제와 임금착취가 심했다. 동원탄좌는 소위 '암행독찰제'라 불리는 노동감시제도를 운용했다. 탄광에서의 노동감시는 일제강점기까지 연원이 거슬러 올라가는데, 6~70년대까지도 일부 광업소에서 운용했다. 그러나 탄광노동자들의 항의가 거세 70년대를 경과하며 폐지되었지만, 동원탄좌만이 유일하게 이 제도를 고집하고 있었다.

동원탄좌의 임금착취 방식은 전 글에서 소개한 사내 매점(당시 소비조합 구판장이라 불렸던)을 이용한 간접적 착취와 더불어, 더욱 치졸한 수법도 있었다. 임금인상 시기가 되면 인상의 기준이 되는 3개월 전부터 임금을 떨어뜨려(도급제 지급을 조작하여) 실질적으로 임금인상효과를 상쇄하는 수법을 사용하곤 했다.

동탄 노동자들은 이러한 회사의 착취에 분개했지만, 노동자의 목소리를 수렴할 노조는 어용화되어 있었다. 상층부의 정경유착이 공고하게 작동하는 만큼 지역사회에서도 공권력-기업 간 유착이 공고했다. 여기에 노조까지 포섭되어 한통속이었다. 당시 노조지부장 선거는 간선제였고, 사측은 대의원들을 매수하여 입맛에 맞는 인물을 지부장으로 세웠다. 어용노조는 반발을 억누르기 위해 폭력조직을 활용했다. 박정희 정권은 초기 탄광개발 과정에서 정화사업을 통해 때려잡은 조폭들을 탄광지역으로 몰아넣었던 바 있는데, 이들은 여기서도 폭력조직을 만들었다. 이들 폭력조직은 공권력과 기업에 포섭되어 노동자들을 통제하는 '집행기구'로서 기능했다. 탄광노동자들은 조폭들이 전횡하는 노조와 어용화한 노조 간부들에 대해 맹렬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3. 항쟁의 직접적 배경 - 동탄 노동자와 어용노조 간 갈등

사북항쟁의 직접적 배경은 항쟁 1년 전인 1979년 4월에 치러진 광산노조 동원탄좌지부 6대 지부장 선거였다. 동탄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5대 지부장이었던 이재기의 퇴진을 요구하는 여론이 들끓었다. 이재기는 1,2,5대 지부장을 역임한 바 있는 대표적인 어용지부장이었다. 그는 2대 지부장 시절 조합비를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처벌받았고 회사를 퇴직했었다. 그러나 사측과 광산노조의 공모로 그는 다시 동탄에 입사하여 5대 지부장에 당선되었던 것이다. 노조규약에 의하면 그는 출마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규약을 무시하고 출마해 억지로 당선되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에 대한 반발이 클 수밖에 없었다.

6대 지부장 선거에서는 이재기에 대항하여 조합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던 이원갑이 무난히 당선될 것으로 예측되었지만, 결과는 이재기의 당선이었다. 이재기가 사측과 공모하여 노조규약을 어기고 자격이 없는 대의원을 추가하여 자기 표를 늘렸기 때문이었다. 이원갑은 광산노조에 이의제기를 신청했고, 조합원들은 전체의 절반이 넘는 1,954명의 서명이 담긴 진정서를 제출했다. 여론에 못이긴 광산노조는 선거무효를 결정하고 재선거를 지시했지만, 사태해결은 지지부진했다. 회사, 강원도청, 경찰, 정보기관 등이 전방위적으로 광산노조를 압박했던 탓이었다. 광산노조 내에서 이재기가 행사한 영향력 역시 작지 않았다.

선거무효 후 동탄노조는 직무대리 체제로 운영되었는데, 노조 내부의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직무대리가 수 차례 바뀌면서 파행을 거듭했다. 6번째 직무대리로 선거무효의 당사자인 이재기가 임명되는 웃지 못할 사태도 벌어졌다. 그런데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80년 3월 31일 이재기 당시 직무대리는 회사와 '20% 임금인상안'에 합의한다. 이 인상안은 그해 광산노조가 결의한 '42.75% 임금인상 요구'에 한참 못 미치는 인상안이었다. 이에 항의하여 4월 16일 이원갑을 비롯한 동탄 노조원 20여 명이 서울에 소재한 광산노조 사무실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인다. 광산노조는 결국 동탄 노동자와 이재기와의 면담을 주선하기로 했고, 농성은 풀렸다. 그러나 사태는 더욱 커지게 된다.

4월 18일 광산노조의 주선으로 열린 면담에서 이재기는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한다. 회사가 나를 밀어주는데 너희들이 나를 어찌 할 수 있겠느냐고 협박하고 나선 것이다. 면담에 참가한 동탄 노동자들은 격분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이재기는 경찰에 신변보호를 요청했고, 경찰은 즉각 이원갑과 신경(이원갑을 지지하던 동탄노조 대의원이었다.)을 연행했다. 노동자들은 곧바로 사북지서로 몰려가 두 명의 석방을 요구했다. 노동자들의 기세에 눌린 지서장은 4월 21일에 경찰의 허가를 얻어 집회를 열 것을 조건으로 두 명을 석방했다. 그러나 경찰은 태도를 바꿔 4월 20일 집회불허를 노조에 통보했다. 그러나 이 통보는 노동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4. 항쟁의 시작

4월 21일 집회 당일에야 불허결정을 알게 된 노동자들은 격분했고, 향후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노조사무실에 모였다. 그때 무리 속에 섞여들어가 채증을 수행하고 있던 사복경찰관이 그 정체를 들켰다. 노동자들이 흥분해 그 경찰관을 붙잡으려 하자, 그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대기하고 있던 지프차에 올라탔다. 그러자 4명의 노동자가 차 앞을 가로막았는데, 운전석에 앉아있던 다른 경찰관은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차를 돌진시키고 말았다. 노동자들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땅에 나뒹굴었지만, 지프차는 그대로 도주했다. 분노는 폭발하고 말았다.

끈끈한 공동체생활이 영위되던 사북지역에서 이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당일 16시경 동탄 노동자들과 지역주민 수천 명은 사북지서를 습격하여 지서장을 폭행하고 기물들을 파괴했다. 일부 시위대는 이재기를 찾기 위해 노조사무실과 노조 간부 사택을 습격했다. 노동자의 부인들이 주도하여 어용노조 간부의 부인들을 폭행하고 능욕하는 일도 있었다. 22일 오전에는 흥분한 노동자들과 지역주민들에 의해 이재기의 부인이 거리로 끌려나와 집단폭행 당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렇지만 21일 밤에서 22일 오전 사이에 벌어진 여러 습격행위는 회사, 공권력과 어용노조와 관련된 장소에 국한되었고, 시장과 민가에 대한 무차별적 습격은 거의 없었다.

4. 끔찍한 유혈 충돌과 시위대의 동요

22일 오전 강원도경찰서는 병력 300여 명을 동원하여 사북지서를 되찾았다. 이윽고 경찰과 시위대는 동원탄좌로 통하는 유일한 길목인 안경다리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당시 경찰병력은 너무 급하게 투입되는 나머지 진압장비도 부실했고 보호구도 제대로 갖춰입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경찰지휘부는 진압을 서둘러 병력을 막무가내로 투입했다.

당시 사북읍 안경다리 주변 지도 (조선일보 1980. 4. 24 1면, 진실화해위 보고서에서 재인용)


끔찍한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당시 수천 명의 대열을 이루고 있었던 시위대는 흥분한 나머지 공권력 투입에 겁먹지 않고 각목을 휘두르고 돌멩이를 던지며 격렬히 맞섰다. 경찰 1명이 사망하고 70여 명이 부상당했다. 경찰지휘부는 황망하게 퇴각을 결정했고, 경찰병력을 뿔뿔이 흩어져 수 시간 뒤에야 재집결할 수 있었다.

경찰이 퇴각한 이후 동탄 노동자들은 동원탄좌 전체를 점거했다. 경찰을 두드려 패서 쫓아낸 여파로 인해 지역주민들 사이의 분위기는 매우 심란해졌다. 각종 유언비어가 나돌기 시작했다. 서울경찰기동대 병력이 전개를 위해 철도로 이동하던 도중 사북역을 지나쳤는데, 그걸 본 지역주민들은 그 병력을 공수부대로 착각하여 공수부대가 쳐들어와 다 죽일 거라는 공포스런 유언비어를 살포했다. 동탄 노동자들은 즉각 화약고와 예비군 무기고를 관리 하에 두었다. 당시 화약고에는 상당량의 TNT가 저장되어 있었고, 예비군 무기고에는 연대급 병력이 무장할 수 있는 소총(칼빈 소총 890정, M1 소총 472정)과 실탄 10만여 발이 보관되어 있었다. 동탄 노동자들은 특히 화약고에 대한 경계에 부심했다. 화약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증언에 의하면 수십 명의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교대조들이 밤을 새워가며 화약고를 관리했다고 한다.

5. 협상 체결 - 시위대의 양보

4월 22일 15시경부터 동탄 노동자-주민대표로 구성된 시위대 측 협상단과 회사-경찰지휘부-광산노조로 구성된 '대책본부' 간에 협상이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이견이 커 진전이 없었다. 23일 오전에는 대책본부의 일방적 주장만이 담긴 '합의서'가 사북읍내에 뿌려져 갈등이 고조되기도 했다. 그러나 양측은 23일 밤부터 밤샘협상을 벌여 24일 새벽 최종합의문을 도출하는데 성공했다. 합의내용을 보면 전반적으로 시위대 측이 양보한 부분이 많았다. 합의내용을 직접 인용해보면,

 

최종 합의된 11개 항은 다음과 같다. 광산노조, 「사북사태 발생에 대한 진상」, 1980, 49~50쪽. (진실화해위, 앞의 책, 177쪽에서 재인용.)

1. 이재기는 이미 사퇴했음

2. 부상자 치료비 및 보상금 일체는 회사에서 책임진다

3. 피해 주택 복구비도 회사에서 전액 부담한다.

4. 하청업자 종업원의 임금인상도 최대한 보장토록 노력

5. 신용조합 운영에 있어서 부실한 원금에 대하여는 회사에서 지급한다

6. 79년도 징계로 인한 상여금 삭감분은 즉시 회사에서 지급한다

7. 이번 사태로 쉰 4일간에 대하여는 휴업수당을 지급한다

8. 현재 250% 상여금을 400%까지 인상하여 분기별로 지급한다

9. 1~2월 임금인상 소급분 20%는 5월 말까지 지급하고 탄가인상시 재조정한다

10. 경찰당국은 이번 사태 수습에 절대로 실력행사를 하지 않기로 한다

11. 금번 사태에 대한 문제는 회사와 당국이 최대의 노력으로 원만히 해결되도록 한다


6. 공수부대 투입 계획

한편 정권은 진압을 위해 공수부대 투입을 계획하고 있었다. 진실화해위 보고서는 군 측 자료를 분석해 공수부대 투입계획을 살펴보고 있는데, 요약해보면 이렇다. 기무사 제출자료에 의하면 최초의 군병력 투입계획은 4월 21일 교통사고 사건 직후 노동자들이 사북지서로 몰려갔을 때, 경찰의 요청에 의해 수립되었다. 또 같은 기록에 의하면 22일 오전에 강원도경찰서는 경찰병력만으로는 진압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1군 계엄사령부에 군병력 투입을 요청했으나, 1군 사령관은 사태악화를 우려해 출동승인을 거부하고 대신 병력 300명을 출동준비시켰다고만 되어 있다.

육군본부에서 발행한 <계엄사>에는 4월 22일 23시 ○○공수여단 ○○대대(40/249명)가 진압을 위해 원주로 부대 배속된 것으로 나타난다.(진실화해위 보고서에서는 익명처리 되어 있는데, 11공수여단이다.) 당시 1군 계엄사는 강원도지사의 유보 요청에도 불구하고 군병력 투입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기무사 제출자료에 의하면 4월 23일 16시 1군 사령부는 사태수습대책회의를 개최하고 한계령에서 훈련 중인 ○○특전여단 ○○대대(40/290명)를 추가배속받고, UH-1H 20대(140명 탑승 가능), 개스살포차 2대(500MD 2대), APC 10대, 객화차 15량을 지원받아 공중과 지상으로 군병력 동시 투입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같은 날 19:10경 육군본부에서 부대 이동 및 배속 지시가 하달되었다. 투입 시점은 4월 25일 BMNT(동틀무렵)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24일 새벽 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군병력은 투입되지 않았다.

7. 신군부의 배신과 항쟁의 종결

합의사항 중에는 경찰이 실력행사를 하지 않고 사태를 원만히 수습한다는 조항도 있었지만, 합의 직후 강원도경찰서와 정보기관은 내사에 착수하여 '주동자 명단'을 작성했다. 이 주동자 명단은 기본적으로 주민 탐문과 현장 채증사진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지만, 한국전쟁 시 가족과 친척들의 부역사실까지 언급되어 있는 등 방대한 신원조회가 동반되었다. 정권은 이들을 '사상범'으로 보고 '대공사건'으로 규정하려 했던 것이다.

군-검-경으로 구성된 '사북사건 합동수사단'은 5월 6일부터 20일까지 동탄 노동자, 지역주민들을 체포하여 조사했다. 연행, 조사 과정에서 보안대원들에 의해 가혹한 구타와 고문이 자행되었다. 사상범으로 몰 물적 증거는 당연히 없었기 때문에, 보안대원과 수사관들은 자백과 제3자에 대한 발고를 강요했다. 이로 인한 이웃 간의 앙금은 이후로도 지역사회를 분열시키는 상처로 남았다. 연행된 총인원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증언에 따라 최소 149명에서 700~800명 사이일 것으로 추측될 따름이다.

처벌받은 사건 관련자들은 출소한 이후에도 '블랙리스트'에 올라 갖가지 고통을 받았다. 회사에 복직했다가 압박을 못 이겨 스스로 퇴직한 경우도 있었다. 관련자와 그 가족들은 상당 기간 동안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일부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할 수 없었다.

당시 언론은 항쟁이 종결된 후에야 사북항쟁을 기사로 다루었는데, 대부분 '난동'으로 규정하고 시위대의 폭력행위를 부각시키는 내용이었다. 신군부는 사북항쟁의 경과를 왜곡함으로써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질서확립'을 명분으로 민주화투쟁을 압박했다. (
출처-오마이뉴스)

8. 광주항쟁의 전주곡

진실화해위 보고서를 통해 80년 4월 당시 사북지역으로의 공수부대 투입 계획이 드러났다. 만약 협상이 결렬되고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80년 당시 사북읍의 인구는 5만여 명이었고, 동탄 노동자의 수는 3,500여 명이었다. 충돌이 가장 컸을 때 시위대의 수는 대략 6,000여 명으로 집계된다. 사북지역은 광주에 비하면 매우 작은 지역사회였지만, 구성원의 대다수가 탄광노동과 관련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연대의식이 강했고 공동체문화가 형성되어 있었다. 만약 공수부대가 투입되었다면 모르긴 몰라도 광주항쟁 만큼 처절한 저항이 벌어졌을 것이고 그 희생 또한 매우 컸으리라 짐작된다. 사북항쟁은 불과 한 달 뒤 일어난 광주항쟁의 전주곡이었던 것이다.

사북지역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저항은 신군부의 위기감을 고조시켰다. 사북항쟁 직후 동국제강, 인천제철 등의 대단위 사업장에서 강경한 파업투쟁이 잇따랐다. 신군부는 '불법행위'는 엄단하겠다는 의지를 거듭 표명했으나 효과가 없었다. 신군부는 공세를 강화하기로 결정하고 '서울역 회군'을 계기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 그리고 광주에서 저항의 불꽃이 피어오르자, 신군부는 사북으로 향할 뻔 했던 11공수여단의 총구를 광주로 겨누게 된다.


참고문헌 (진실화해위 보고서는
http://www.jinsil.go.kr/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남춘호, 「1960~70년대 탄광산업의 이중구조와 노동자상태」, 『1960~70년대 한국노동자의 계급문화와 정체성』, 한울아카데미, 2006.

-네이버 백과사전 ‘탄좌’ 항목, http://100.naver.com/100.nhn?docid=154231.

-柳志星, 「우리나라 石炭產業의 現況과 效率化方案」, 『경제연구』 제6권 제1호, 한양대 경제연구소, 1985.

-이원보, 『한국노동운동사 5-경제개발기의 노동운동/1961~1987』, 지식마당, 2004.

-전명혁 외, 사북청년회의소 편, 『탄광촌의 삶과 애환-사북․고한 역사연구』, 선인, 2001.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80년 사북사건」, 『2008년 상반기 조사보고서』, 2008.

-탁경명, 『80년 4월의 사북』, 강원일보사, 2007.

☞ 목차
사북항쟁과 석탄산업 (1) - 한국 석탄산업과 탄광노동자
사북항쟁과 석탄산업 (2) -  1980년 4월 사북항쟁의 경과


핑백

덧글

  • 나아가는자 2009/04/16 01:42 # 답글

    이런 사건이 있었는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흥미가 가는 사건이기도 하고...억압적인 질서에 저항하는 어려운 일을 했던 일들이 더 많았겠군요. 저는 미처 알지 못했지만 말입니다.
  • 자유로픈 2009/04/16 23:43 #

    저도 공부하면서 새삼 잊힌 기억들이 많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사북항쟁의 경우에는 특히 동시대의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이라는 커다란 기억들 사이에 묻힌 감도 없지 않나 싶습니다. 사북항쟁은 시기도 짧았던 데다가 지역 자체도 서울이나 광주와 달리 외진 산간지역이었으니까요...
  • ghistory 2009/04/16 21:52 # 답글

    화약의 무서움: 발파작업이 잦았나 보지요?
  • 자유로픈 2009/04/16 23:46 #

    채굴작업에서 발파작업이야 없어서는 안 될 과정이지요. 발파작업 자체가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발파작업 중 낙반사고도 자주 있었습니다. 탄광사고 중 낙반사고로 인한 사망자 비중이 제일 높더군요.
  • ghistory 2009/04/16 21:53 # 답글

    신용조합: 무엇인지요?
  • 자유로픈 2009/04/16 23:51 #

    뭐 통상적인 의미의 신용조합이 아니었을런지요. 탄광노동자들을 상대로 신용을 제공하는 등의 업무를 하던 조직이었겠지요. 동탄의 신용조합이 어떻게 운영되었길래 합의문에 저런 내용이 들어갔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 ghistory 2009/04/16 23:56 #

    신용협동조합?
  • 자유로픈 2009/04/17 00:18 #

    음...제가 알기로는 어떤 큰 노동조합이나 자치조직에서 신용조합이란 걸 운영하는 경우가 있다고 알고 있는데요. 검색해보니 국어사전에 신용협동조합과는 다르게 정의되어 있네요. 조합원이나 조직원들을 상대로 대출을 해주는 복지 성격이 있는 금융조직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뭐 예를 들자면 문득 생각나는데 일본의 총련에서 신용조합을 운영하는데, 그게 재일조선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들었습니다.
  • ghistory 2009/04/17 01:05 #

    설명 감사합니다.
  • ghistory 2009/04/16 21:55 # 답글

    79년도 징계: 무엇인지요?

    하청업자 종업원: 앞서 언급했던 작은 탄광들의 노동자들인지요?

    피해 주택 복구비: 왜 이 문제를 노동자들이 중시했는지요? 나중에 소송을 당하지 않도록?
  • 자유로픈 2009/04/17 00:04 #

    79년도 징계는, 어디선가 봤는데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진 않네요. 선거를 둘러싼 다툼과정에서 어용노조와 회사에 반발행동을 한 조합원들이 징계를 받아 상여금이 삭감되었던 바 있습니다.

    탄광지역에서는 덕대제를 하청이라고도 많이 불렀답니다. 덕대탄광의 노동자를 지칭하는 게 맞습니다.

    노동자들이 특별히 중시한 조항은 아닌 거 같은데요. 다른 조항들과 마찬가지로 조금 소박해보이기까지 하는데요. 진실화해위 보고서에 따르면 협상과정에서 시위대 측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조항은 10번과 11번 조항이었답니다. 제 느낌인데, 당시 경찰을 죽인 여파로 인한 심란한 분위기와 공수부대 투입 유언비어 등으로 인해 노동자와 지역주민들이 상당히 위축되었던 것 같습니다. 협상결과도 결국 임금인상률이 처음에 이재기가 합의해준 20%와 같은 등 획기적인 성과는 보이지 않습니다. 많이 양보한 셈이지요.
  • ghistory 2009/04/16 21:56 # 답글

    익명처리 되어 있는데: 이유가 무엇일지요?

    APC: 병력수송 장갑차인지요?

    BMNT: 무엇의 약자인지요?
  • 자유로픈 2009/04/17 00:10 #

    진실화해위 보고서에서는 인명과 부대명이 익명처리되어 있습니다. 공공성을 띤 보고서라 신중을 기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요? 제가 위원회의 위상이나 운영과정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어 정확한 연유는 모르겠네요.

    군사용어는 저도 잘 모릅니다. 인용했을 뿐이죠. 검색해보니 APC는 병력수송 장갑차를 지칭하는 게 맞는 거 같습니다.

    BMNT는 검색해보니, BMNT : Beginning of Morning Nautical Twilight 라고 소개되어 있네요. 일출 전 30분 가량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 ghistory 2009/04/17 00:16 #

    아마 그 위원회가 가해자들을 규명할 권한은 없고 피해자들을 신원하는 기능만 지니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 ghistory 2009/04/16 21:56 # 답글

    발고→고발.
  • ghistory 2009/04/16 21:57 # 답글

    보안대원: 누구를 지칭하는지요?
  • 자유로픈 2009/04/17 00:13 #

    군검경으로 구성된 합동수사본부 내에 수사반과 함께 헌병대와 보안대 등이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짐작컨대 군 보안부대원들이 합수부의 보안대를 구성했겠지요.
  • ghistory 2009/04/17 00:16 #

    감사합니다.
댓글 입력 영역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자치준비모임

Photo

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자치준비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