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북항쟁과 석탄산업 (1) - 한국 석탄산업과 탄광노동자 한국사를 보는 시각


 
2009년 3월 26일 눈이 펑펑 오는 아침, 강원도 정선군의 사북탄광(개인 소장)


0. 들어가며


얼마전 다녀온 답사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소는 아무래도 사북탄광이다. 개인적으로 현대사에 관심이 많기도 하거니와, 그래서 답사자료집에 수록될 사북항쟁에 관한 연구보고 과제를 맡아 쓰기도 했기 때문이다.


강원도 정선군에 위치한 사북탄광은 남한 최대의 민영 탄광기업이었던 '동원탄좌'가 경영했던 탄광이다. 2004년 채굴이 중지되었으며, 현재는 강원랜드 부지에 속해 유적지로 보존되고 있다.


한국사에 관해 어떤 주제나 사건을 공부할 때마다 항상 부딪치는 고민은, 당대의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잘 모르는데서 나오는 갑갑함이다. 사북항쟁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그런 고민은 더욱 나를 괴롭혔다. 도대체 광부의 삶이 어떠했기에 사북항쟁이 일어났는지 피부로 와닿을 만큼 알 수가 없었다. 우리가 흔히 '막장'이라는 말을 자주 쓰지만, 도대체 막장이 뭐가 어떻길래 '막장'일까. 모르는 분들을 위해 첨언하자면, 막장이란 탄광 가장 깊은 곳, 즉 석탄을 직접 캐고 있는 현장을 말한다. 심하면 40도를 오르내리는 고온, 입을 벌리기조차 힘들 정도로 자욱한 탄가루, 탄을 캐고 나르는 고된 노동, 언제 발생할지 모를 낙반사고의 공포...광부들은 스스로를 '인생막장'이라 부르곤 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젊은 세대는 탄광이나 광부의 이미지를 직접 눈과 몸으로 체험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광부들의 피땀으로 이룬 석탄산업이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고 사라졌는지 알기가 힘들고, 사실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망각이란 무서운 존재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했든, 기억하려 하지 않으면 금새 잊힌다.


나는 한국 현대노동운동에 대해 공부하면서 도시의 이른바 '공돌이', '공순이'들의 삶에 관해서는 자주 접한 바 있다. 평화시장의 아우들을 위해 온몸을 불사른 전태일의 덕이고, 똥물을 뒤집어써가며 싸운 동일방직 노동자들의 덕이다. 하지만 도시가 아닌 외진 산간지방에서 또 다른 '산업전사'로서 희생을 강요받고 있던 탄광노동자들에 대해서는 접할 수가 없었다. 그들의 삶과 운동을 다룬 기록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그들의 삶을 접할 수 없었다. 사북항쟁이란 사건은 어디선가 잠깐 듣고 스쳤던, 현대사에서 무수하게 부침했던 여느 사건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1. 주제를 접하면서 떠올린 이미지와 의문


나는 '사북사태와 석탄산업'이라는 답사자료집에 수록될 연구보고 주제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영화 <빌리 엘리어트>를 떠올렸다. 그게 나에게 가장 익숙했던 탄광의 이미지였다. 그리고 최근 방영되었던 드라마 <에덴의 동쪽>도 떠올렸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그 드라마가 사북사태에서 모티브를 따왔다는 글을 언뜻 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에덴의 동쪽>은 1961년의 탄광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나중에야 알긴 했지만 고증을 아주 엉터리로 했다. 기억을 더 더듬어보면 2006년 KBS에서 방영한 드라마 <서울 1945>도 일제강점기의 탄광촌이 초기 배경이었다. 따지고 보면 근현대사를 다룬 영상물들 중에서는 심심찮게 탄광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빌리 엘리어트>는 1980년대 영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탄광파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석탄산업이 경쟁력을 잃어가자 대처정권은 가혹한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는데, 이에 탄광노조가 극렬하게 반발하면서 사회 전체를 뒤흔든 파업사태로 번졌다. 영화는 이러한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데, 나는 특히 빌리의 아버지가 자식의 꿈을 이뤄주기 위해 '배신자'라는 욕을 들으면서도 일터로 나가던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빌리 엘리어트>의 한 장면. 뒤로 탄광이 보인다.(출처)


영국 외에도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은 대개 그 나라의 정치사회를 뒤흔든 탄광파업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1910년대 미국사회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콜로라도 탄광파업(관련 포스팅)이나 1950년대 일본사회에서 '총자본 대 총노동의 대결장'이었던 미쓰이 미이케 탄광파업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는 60~70년대 이런 충격적인 파업이 발생하지 않았다. 탄광노동자들의 대우가 다른 나라에 비해 좋아서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탄광노동자들이 처한 조건은 타국에 비해 엄청나게 열악했다. 재해율만 봐도 타국에 비해 몇 배에 이르는 수준이었다. 사북항쟁과 한국 석탄산업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하면서, 제일 처음 든 궁금증이 바로 이것이었다. 왜 한국에서는 사회에 충격을 준 탄광파업이 일어나지 않았을까.


2. 한국 석탄산업 개황


한국의 석탄산업은 그 뿌리가 조선시대 말 개항기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는 하지만, 해방 후 외국자본이 물러가고 전쟁으로 인해 탄광시설이 파괴되면서 석탄산업은 크게 침체했다. 이승만 정권은 미국의 원조에 의지해 석탄산업 개발계획을 세우긴 했지만, 정권의 무능력과 한국 제조업의 침체로 인해 성과를 보지 못했다. 박정희 정권 때에 비로소 석탄산업은 성장의 계기를 맞는다. 박정희 정권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면서 석탄개발 역시 의욕적으로 추진했다. 다른 선진 자본주의 국가도 마찬가지였지만, 산업화를 위해서는 동력자원 개발이 필수적으로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권은 다른 중점 보호산업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기업에게 특혜(광업권)를 몰아주는 방식으로 석탄산업을 키웠다. 1963년 설립된 동원탄좌 역시 특혜를 받아 성장한 기업이었다.


60년대에는 박정희 정권의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으로 인해 석탄산업의 성장이 더뎠다. 그러나 70년대 오일쇼크가 불어닥친 후, 박정희 정권은 주탄종유(主炭從油)로 전환하고 석탄개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된다. 70년대 한국 석탄산업은 빠른 속도로 성장하며 산업화의 견인차 역할을 떠맡았다. 80년대 이후 자원고갈로 인해 석탄 개발 비용이 급증하고 환경보전 논의가 비등하면서 석탄산업은 침체하기 시작했고, 결국 80년대 말 정부는 사실상 석탄산업을 포기하는 '석탄산업 합리화 정책'을 시행하게 된다. 90년대 이후에는 몇몇 거대 탄광기업만이 석탄산업을 유지해오다가, 2004년 동원탄좌가 사업을 포기하면서 한국의 민영 탄광기업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현재는 석탄공사 소속의 탄광만 운영되고 있다.


3. 한국 석탄산업의 '이중 구조'


한국의 석탄산업은 다른 국가와는 구별되는 산업구조를 갖고 있었다. 바로 대규모 탄좌기업과 소규모 영세탄광기업으로 나뉜 '이중구조'였다. 기본적인 요인은 한국에서의 석탄자원 부존형태이다. 한반도의 무연탄 부존형태는 극심한 지각변동으로 인해 연속성이 부족하고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로 인해 대규모로 탄광을 개발하기는 힘들고 소규모의 개발을 할 수밖에 없는, 그리고 작업의 기계화를 이루기도 힘든 조건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정희 정권은 석탄부존지역을 대단위 지역으로 분할하여 탄좌(炭座)를 설정하고, 탄좌의 광업권을 단 하나의 대기업에게만 부여했다. 그러나 하나의 대규모 탄좌기업이 모든 소규모 광구까지 개발하기에는 비용이 너무 많이 들었다. 그래서 이른바 '덕대'제도가 성행하게 되었다. '덕대'제도란 농업의 지주소작제와 유사한 개념이다. 영세탄광업자가 광업권을 소유한 대기업(모광)과 임대차계약을 맺고 광구를 경영하면서 일정한 분철료(分鐵料)를 모광에 납부하는 경영형태이다. 덕대제는 엄연히 불법이었으나, 석탄증산에 목매고 있던 정부는 그것을 사실상 묵인했다. 오히려 영세탄광기업에 보조금까지 지원해가며 덕대제의 존속을 부추겼다.


모광과 덕대기업으로 이루어진 이중구조는 수익은 모광으로 집중시키는 반면 부담은 노동자에게로 집중시키는 경향을 조성했다. 모광기업은 수익성이 좋은 대규모 광구 개발에만 치중했고 소규모 광구 개발은 영세탄광기업에게 떠넘겼다. 영세탄광기업은 경제성이 낮은 광구에서 최대한 수익을 내기 위해 노동자를 착취하고 설비의 노후화를 방치했다. 정부는 이러한 덕대제를 묵인했고 탄광노동자의 처우개선에도 별무관심이었다.


4. 탄광노동시장의 분절과 열악한 노동조건


석탄산업의 이중구조로 인해 탄광노동시장도 분절되어 있었다. 석탄공사나 대규모 탄좌기업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학력과 건강상태가 좋아야 했고, 워낙 경쟁률이 심해 뒷돈과 연줄을 동원해야 했다. 노동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았기 때문이었다. 탄좌기업들은 현장의 닳고닳은 광부를 뽑기보다는, 서울 등의 대도시에서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신출내기들을 모집해 교육시켜 투입하는 쪽을 선호했다. 갖가지 기구한 사연을 품고 탄광지역에 들어온 뜨내기들은 1~2년을 덕대 탄광에서 고생하면서 탄좌기업에 취직할 기회를 잡아야 했는데, 기회를 얻지 못했을 경우에는 결국 끝까지 덕대 탄광에서 최소한의 법적보호조차 받지 못한 채 고된 노동을 감내해야 하는 처지에 몰려야 했다. 운좋게 탄좌기업에 취직해서도 편하게 노동하기는 힘들었다. 광범한 2차 노동시장의 존재로 인해 근로계약은 기업주에 유리하게 체결될 수밖에 없었고, 노동자는 권리를 주장하기 어려웠다.

 

탄좌기업의 탄광노동자들이나 덕대기업의 탄광노동자들이나 상대적 차이가 있을 뿐 열악한 노동조건을 감수해야했다는 점은 임금지급방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탄광의 임금형태는 일종의 성과급제인 '도급제'가 일반적이었다. 탄광기업들은 높은 비용을 들여 채굴과정을 기계화하는 대신 노동집약적 채굴방식을 선호했는데, 인건비 부담 마저 최대한 줄이기 위해 도급제를 운용했다. 그리고 막장이 곳곳에 분산되어 있는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노동통제를 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탄좌기업의 경우에는 기본급 비율이 조금 더 높았을 뿐, 도급제 방식은 마찬가지였다.


도급제는 당일 캐낸 석탄량을 기준으로 계산되었는데, 노동의 성과가 그대로 임금으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측면에서 비합리적이었다. 그 이유는 그날 일하는 광구의 조건에 따라 동일한 노동량을 투여해도 산출되는 석탄량은 달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작업조 동료가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서도 채굴량은 바뀔 수 있었다. 그리고 기업체는 의도적으로 매우 복잡한 계산방식을 고안하여 자의적으로 임금을 착취했다. 게다가 '부비끼'와 같은 관행까지 있었다. '부비끼'란, 채굴 직후 광차에 석탄을 수북이 실어도 운반과정에서 진동으로 인해 부피가 줄어들게 마련인데, 무게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음에도 광차가 가득 차지 않았다는 핑계로 채굴량을 축소시켜 기록하는 관행이다.


5. 탄광노동자들의 열악한 생활상태


탄광노동자들의 생활상태는 매우 열악했다. 석탄산업이 한창 성장하고 있던 시기에는 "탄광촌에서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그것은 허상이었다. 명목임금상으로는 탄광노동자들이 받는 임금이 결코 적지는 않았다. 그러나 위에서 설명한 도급제나 부비끼 등으로 인해 탄광노동자들은 명목임금에 적시된 임금을 다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임금지급이 화폐가 아닌 현물로 제공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화폐를 만지기 위해서는 할인해서 되팔아야 했다. 또 탄광지역은 지역적 고립성으로 인해 물가가 비쌌다. 탄좌기업들은 매점을 운영하면서 각종 생필품을 비싼 값에 독점적으로 공급하여 노동자를 착취하곤 했다.


사북 탄광촌의 풍경들(출처)


탄광촌은 상하수도 등 인프라가 매우 부족했다. 탄광이 개발되기 전까지 강원도 산간지역은 화전민들이나 살던 한적한 곳이었으나, 탄광 개발과 함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탄광촌을 형성했다. 탄광촌에 대한 상하수도 정책이나 주택정책 등의 사회간접자본 정책은 거의 없었다. 상하수도 시설의 미비로 탄광노동자들은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살아야 했고, 주택의 부족으로 탄광노동자 가족들은 갖은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탄좌기업의 경우에는 사택을 지어주긴 했으나, 비오면 물새고 방음도 전혀 안 되는 열악한 시설이었다. 그나마 영세탄광을 전전하던 노동자의 경우에는 셋방조차 구하기 어려워 산 중턱에 움막을 짓고 생활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당시 어떤 어린아이의 표현대로 "산중턱에 개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모습이 탄광촌의 모습이었다. 

☞ 목차
사북항쟁과 석탄산업 (1) - 한국 석탄산업과 탄광노동자
사북항쟁과 석탄산업 (2) -  1980년 4월 사북항쟁의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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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북항쟁과 석탄산업 (2) - 1980년 4월 사북항쟁의 경과 2009/04/15 23:18 #

    사북항쟁과 석탄산업 (1) - 한국 석탄산업과 탄광노동자1. '사북항쟁'이란 명칭에 관해1980년 4월 사북지역에서 동원탄좌 탄광노동자들이 주도하고 영세탄광기업 노동자들, 탄광노동자 가족들, 지역 중소상인들이 호응하여, 어용노조와 회사, 궁극적으로는 독재정권을 상대로 하여 강경한 저항권을 행사했던 이 사건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나는 이전 글부터 '사북항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연구보고를 쓰는 과정에서 이 사건에 항쟁이란 이름을 붙여도 좋다...... more

덧글

  • ghistory 2009/04/13 00:08 # 답글

    지난해에 BBC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보았는데, 도이칠란트에서 올해 최후의 탄광을 폐쇄한답니다. 180년 가까이 도이칠란트 공업화의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산업이 종말을 맞이한다니, 세상의 변화가 무상할 따름입니다.
  • 자유로픈 2009/04/13 00:18 #

    산업화의 한 고비가 넘어가고 있는 현상을 반영하는 것일까요...
  • ghistory 2009/04/13 00:22 #

    석탄산업의 선도국가가 이제 재생에너지산업의 선도국가로 변신했지요.
  • ghistory 2009/04/13 00:09 # 답글

    빌리 엘리어트: 뮤지컬의 한국어판이 제작중입니다.
  • ghistory 2009/04/13 00:10 # 답글

    빌리 엘리어트의 배경이 되는 1984년~1985년의 파업은

    http://en.wikipedia.org/wiki/UK_miners%27_strike_(1984%E2%80%931985) 참조.
  • ghistory 2009/04/13 00:11 # 답글

    개인 소장: 주인장이 찍으신 것입니까?
  • 자유로픈 2009/04/13 00:14 #

    제가 찍은 건 아니고 같이 답사에 참가한 후배에게 부탁해 받은 사진입니다.
  • ghistory 2009/04/13 00:12 # 답글

    고증을 아주 엉터리로 했다: 그 드라마를 보지 않아서 모르겠는데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 자유로픈 2009/04/13 00:21 #

    저도 드라마는 보지 않아서 관련 기사들을 참조한 바 있는데, 예를 들면 배경이 1961년인데 그때에는 어용노조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조 대 회사의 대립구도는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드라마 초기 배경이 그런 구도라는군요. 그리고 작업 후 샤워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도 60년대에는 꿈도 못 꾸던 사치였다고 합니다. 그런 복지시설은 대부분 80년 사북항쟁 후 전두환 정권의 회유 정책을 통해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관련 기사 중 하나 링크하자면,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969641
  • ghistory 2009/04/13 00:23 #

    감사합니다. 조갑제가 '사북사태' 를 취재해서 재직중이던 잡지『다리』에 게재했다고 들었습니다.
  • 자유로픈 2009/04/13 00:38 #

    조갑제가 제정신이 좀 박혀있을 때일까요?
    탁경명이라는 당시 중앙일보 기자도 사북을 취재하다가 보안대에게 폭행당하고 구속되어 처벌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최근에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되어 보상도 받았답니다. 근데 그 사람이 80년 사북을 다룬 책을 냈는데, 내용은 '사북사태'는 결코 노동항쟁이나 민주항쟁이 아니라 그냥 폭동이었다는 것입니다...뭐 일단 그렇다는;;;
  • ghistory 2009/04/13 00:48 #

    1980년대 초반까지는 멀쩡한 인간이었습니다.
  • ghistory 2009/04/13 00:48 #

    뭐 '사북사태' 자체는 원초적 폭동 수준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요.
  • ghistory 2009/04/13 00:13 # 답글

    콜로라도 탄광파업: 링크처리가 안되어 있습니다.
  • 자유로픈 2009/04/13 00:22 #

    정신이 없네요...;;;
  • ghistory 2009/04/13 00:16 # 답글

    박정희 정권의 주유종탄(主油從炭) 정책: 그 당시 이런 정책결정의 이유를 아시는지요?

    중앙일보에서 지난해인가 석탄공사 소속 광원들의 노동조건을 보도했는데, 세월이 달라져서인지 노동조건 보장은 괜찮은 편이더군요.

    덕대제도는 조선후기의 용어인 줄만 알았는데 이게 부활하다니 신기하군요. 용어 자체도 그대로 계승한 것인지요?
  • 자유로픈 2009/04/13 00:26 #

    덕대제란 용어가 본래 다른 의미를 가진 용어였던가요? 암튼 탄광지역에서 덕대제란 말은 일제강점기부터 널리 쓰였다고 합니다. 현장에서는 '하청'이라고도 많이 불렀다는데요. 제가 참조한 논문에서는 '덕대'의 어원은 불분명하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 ghistory 2009/04/13 00:26 #

    조선 후기부터 이어져 온 어휘일 겁니다.
  • 자유로픈 2009/04/13 00:46 #

    주유종탄 정책의 배경은, 글쎄요 제가 본 논문에서는 배경이 명료하게 드러나있지는 않더군요. 논문에서 소비량 추이를 제시한 표를 본 기억이 있는데, 60년대에 석유나 석탄이나 소비량은 증가합니다. 그런데 전체소비량 중 소비 비율을 보면 석유가 급격히 증가해 60년대 중후반에 석탄을 크게 앞지르게 됩니다.(대략 70% 차지) 즉 소비증가율이 석유가 월등했다는 것이지요.
    그때는 석탄보다 석유가 싸서 그렇지 않았을까요? 일단 그저 추측일 따름입니다.

    70년대에는 주탄종유라고는 하지만, 표를 보면 석유:석탄=7:3 비율은 거의 바뀌지 않습니다. 즉 국내 석탄소비량이 느는 만큼은 석유 소비량도 늘었다는 뜻입니다. 다만 60년대에 비해 석탄의 소비비율이 줄어들지는 않았기 때문에 주탄종유라고 한 것 같습니다. 박정희정권이 분명히 국내 석탄산업에 관심을 기울인 것도 맞구요. 아무리 오일쇼크 상황이었다고 해도, 기왕에 석유를 소비하기 시작한 구조는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함의일지 모르겠네요.
  • ghistory 2009/04/13 00:50 #

    하기야 1973년 이전까지는 1배럴 평균 가격이 2달러였다니까요.
  • ghistory 2009/04/13 00:18 # 답글

    분철료/탄좌: 이해는 가는데 왜 이런 표현들로 지칭하게 되었을지요? 일본어들?

    부비끼: 일본어인지요?
  • 자유로픈 2009/04/13 00:29 #

    분철료의 어원은 제가 참조한 논문들에는 나와있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덕대제와 같이 쓰이지 않았을까요.
    탄좌는 제가 본 논문에 의하면 박정희 정권이 '석탄개발 임시조치법'을 제정하며 처음으로 만든 개념으로 나와있는데요. 뭐 외국에서 쓴 개념을 번역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부비끼의 어원 역시 잘 모르겠는데, 어감상 일본어인 듯도 합니다. 제가 본 논문에선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져온 악습이었다고 하니, 아마 일본어일 거라고 생각되긴 하는데, 제가 일본어를 몰라서리;;
  • ghistory 2009/04/13 00:34 #

    아무래도 한국어식 표현들이 아니지요. ~좌 라든지. 분탄이 아니라 분철이라든지 하는 게.
  • ghistory 2009/04/13 00:20 # 답글

    현물로 제공되는: 석탄으로 지급인지요?

    탄광촌에서는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닌다: 이게 사실이라 하더라도 이건 1987년 직후에 노동권이 강화한 아주 단기간만 실제로 그러했을 것 같네요.
  • 자유로픈 2009/04/13 00:32 #

    석탄은 아니고 주로 쌀로 지급되었다고 합니다.

    탄광촌에 가면 한 몫 잡을 수 있다는 소문은 6,70년대에도 많았지만, 그 소문은 허상이었지요. 87년 이후에는 어차피 노동조건이 상대적으로 나았던 탄좌기업의 광부들만 살아남았긴 했지요.
  • ghistory 2009/04/13 00:34 #

    지독한 착취였군요.
  • ghistory 2009/04/13 00:25 # 답글

    사실 어느 국가든 광업에서의 노동착취가 가장 격심하고, 초기 노동운동의 중심도 바로 광업노동자들이라고 하더군요. 대표적 사례는 2차산업이 온통 광업으로 구성하였던 칠레입니다. 그래서인지 중남아메리카에서는 드물게도 포퓰리즘적 좌파가 아닌 좌파정치가 전개하였지요.

    매점 이용 착취는 전세계 공통이군요. 언제나 서로 가르쳐줬을 것 같지도 않은데.
  • 자유로픈 2009/04/13 00:33 #

    중남아메리카에서 최근 불고있는 좌파정치 바람의 기본적 요인인가요. 흥미롭네요...
  • ghistory 2009/04/13 00:34 #

    아니오, 20세기 초반 칠레 좌파정치만의 성장배경입니다.
  • 자유로픈 2009/04/13 00:47 #

    아 문맥을 잘못 이해했군요.;;;
  • Luthien 2009/04/13 05:08 # 답글

    제가 사북 출신인데, 태백/영월이나 당시 수도권과 비교해도 복지회관 (말씀하신 매점) 의 판매가가 그리 비싸진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
    복지회관 자체도 동원탄좌 등의 직접관리와 입점제의 혼용이었고요.
    중앙사택이나 동원아파트 같은 경우에도 입주비용이 높았던 적은 없습니다. (..................)
  • 슈타인호프 2009/04/13 05:33 #

    아마 더 옛날 6070년데 이야기인 듯.
  • 자유로픈 2009/04/13 22:02 #

    답사현장에서 안내하시는 분에게 듣기도 하고 논문에서 보기도 했는데, 대부분의 복지시설이나 복지정책은 사북항쟁 후에 도입되었다고 합니다. 사북항쟁 이전에는 샤워시설 조차 없었다고 하니 말 다했죠... 사내 매점은 사북항쟁 이전까지는 동원탄좌 이연 회장의 친척이 경영했는데, 비싸게 팔았다고 합니다. 사정상 광부들은 외상으로 구매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걸 일일이 기록해두었다가 월급 지급 시 자동적으로 공제해버렸다고도 하더군요.
  • 슈타인호프 2009/04/13 05:32 # 답글

    덕대(德大)는 조선시대부터 쓰던 단어입니다. 조선시대의 덕대는 광산 주인과 계약을 맺어 채굴권을 확보하고 자금을 조달하여 직접 채굴에 나서는 사람으로, 말씀하신 내용과 거의 같은 일을 했습니다. 백과사전을 확인해 보시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요.

    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i=275968
  • 자유로픈 2009/04/13 22:03 #

    아니 이건 뭥미ㅡㅡ;; 논문에서 어원을 모르겠다는 말만 철썩같이 믿고 검색도 안 해봤는데 말입니다...암튼 고맙습니다.
  • 이준님 2009/04/13 08:01 # 답글

    사북 사건이면 "병"가지고 여자에게 장난치기 -_-;;장면도 있지요. 많은 기자들 -조갑제부터 탁경명까지 공통으로 나오는 이야기지만 차마 사진 공개는 안하더군요
  • 자유로픈 2009/04/13 22:07 #

    네...제가 본 자료들에서도 그저 "어용노조 간부의 부인들은 일부 시위대에게 능욕당했다" 정도의 기술만 있을 뿐입니다.
  • 감자부침개 2009/04/13 09:06 # 답글

    사북 사태에 관해서라면 국내에서 제작된 "먼지, 사북을 묻다"라는 영상물이 있습니다.
    http://www.indiedb.net/shop/shop/item.php?it_id=1210660144
    저는 상영당시 시간이 안맞아서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평은 꽤 좋은 편이더군요.
  • 자유로픈 2009/04/13 22:08 #

    공부하면서 이런 다큐멘터리가 있다는 걸 알긴 했는데, 저 역시 보지는 못했습니다. 영상자료는 KBS 인물현대사만 참조할 수 있었습니다.
  • 그냥 2009/07/07 17:06 # 삭제 답글

    오늘 어찌 여기까지 왓는데 많은 공부 하고 감니다.ghistory 님,자유로픈님외 여러분 항상 행운이!!
  • 자유로픈 2009/07/07 23:58 #

    격려 고맙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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