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현대 정치사 연구 단상 -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역사비평사, 2012) 한국사를 보는 시각

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일반인의 상식과 역사학의 현실이 어긋나는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근현대 '정치사' 연구의 현황이다. 한국사람들이 평소 정치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한국사 연구자들도 당연히 정치에 관심이 많으며 정치사 연구 역시 많이 되어 있을 것이라고 으레 생각하는 수가 많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볼 때 한국 정치사, 특히 근현대 정치사는 그러한 '사회적 기대'에 부응할 만큼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한국 근현대 정치사 연구는 일단 시작부터가 늦은 편이었다. 동학농민운동/전쟁에 관한 연구가 단속적으로나마 시작된 시기가 1960년대 중반이었다. 1969년 동아일보에서 3.1운동 50주년 기념논문집을 펴내면서 근현대 정치사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60년대 중후반부터 동학농민운동/전쟁, 애국계몽운동, 3.1운동, 대한민국임시정부 등 근대 정치사(독립운동사)에 속하는 주제들이 조금씩 연구되기 시작했다. 
 
정치사 연구는 전반적인 주제를 다양하게 다루기보다는, 그때 그때의 유행에 따라 특정 분야에 치중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온 경우가 많았다. 1970년대에는 주로 3.1운동이나 임시정부와 같은 우익 계열 독립운동을 주로 연구했다. 개항기에서는 동학과 애국계몽운동(독립협회 같은)을 주로 다루었다. 당시 한창 바람이 불던 '식민사관 청산, 민족주의 역사학 수립' 열풍에 영향을 받은 연구경향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항기-일제강점기 정치사에서 '반외세(항일) 반봉건 민족주의 운동'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려 한 것은 당연했다.

1980년대 들어서는 정치사 학계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변혁이론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급진 성향의 소장 연구자들이 성장하면서 정치사 연구의 흐름이 바뀌었다. 이들은 근대 정치사에서 그동안 조명받지 못했던 공산주의운동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조선공산당 운동이나 적색 농민, 노동운동, 국외 공산주의자들의 항일운동 등이 주된 테마였다. 한편 일군의 연구자들이 해방 이후 미군정기 정치사 관련 연구를 시작하면서, 현대 정치사 연구가 비로소 문을 열었다. 반미주의 열풍 속에서 연구자들은 '과연 미국이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묻게 되었고, 자연스레 해방 직후 미군정기 정치사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흐름을 만든 소장연구자들이 1990년대까지 활발히 활동하면서, 정치사 연구에 관한 주요 저작들이 90년대에 많이 출판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사 연구 열풍은 90년대 들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고, 2000년대 들어서는 오히려 기피 경향까지 생겨났다. 정치사는 복잡하고 지루하다는 인식이 커지면서 인기를 잃어가는 반면, 기존의 역사인식에서 드러나지 않았던 것들을 다루려는 사회사나 문화사 영역의 연구들이 조명받기 시작했다. 한편에서는 '식민지수탈론-식민지근대화론' 논쟁을 불러일으키면서 근현대 경제사 연구도 불붙기 시작했다.

현재 근현대 정치사 연구는 과거에 비해 그 활력이 상당히 줄었고, 조금 심하게 말한다면 찬밥 신세의 '비인기 종목'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정치사 연구 유행이 후퇴한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정치사 연구를 관통하는 거시적인 문제의식을 미처 정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90년대 등장한 이른바 '식민지 회색지대' 문제제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과거 근현대 정치사 연구를 지배했던 '반외세 반봉건, 친일-항일, 민족-반민족, 좌-우'라는 도식 구도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구도를 보완하거나 넘어서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있지만, 명확히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관해서는 여전히 암중모색, 각개약진 중인 것 같다. 어쩌면 과거처럼 어느 하나의 뚜렷한 구도를 지닌 사관이 학계를 풍미하는 시절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아무튼 수없이 등장하는 인물들과 조직들의 이름들을 외우고, 그들 간의 계보를 만들고, 그들이 일으키는 수많은 사건들을 일일이 분석하는 복잡하고 지루한 작업을 견디게 할 만큼의 열정적인 문제의식을 역사학도들에게 던져줄 수 있다면, 한국 근현대 정치사는 다시 빛을 볼 날이 있을 것이다.

최근 역사비평사에서 펴낸 '20세기 한국사' 시리즈 중 <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을 읽으면서 새삼스레 근현대 정치사 연구에 관해 생각해보았고, 그 단상을 글로 적어보았다.

개항기, 대한제국기 정치사는 개항(근대화)-쇄국(봉건), 친일(민족)-항일(반민족) 구도가 뒤섞인 가운데 연구되어 왔다. 명확한 대립구도의 설정은 근대화와 자주독립을 지향하는 한국사상을 선명하게 구성할 수 있게 해주었지만, 당대의 정국에서 드러났던 복잡한 면들을 세밀하게 바라보기 힘들게 하는 약점도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문제가 있다. 대한제국 말기에 활동했던 주요 정치단체 중에 대한협회와 일진회가 있었다. 이 두 단체는 모두 독립협회를 뿌리로 하여 만들어져 근대적 의회민주주의와 산업화를 지향하는 강령을 가졌고, 통감부 체제 하에서 황제권을 제한하고 의회를 축으로 한 '내정자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었다. 그런데 위와 같은 대립 구도 하에서는 대한협회는 '애국계몽운동'을 벌인 애국적 민족주의 단체이고, 일진회는 나라를 팔아먹은 천하의 나쁜 놈이다. 이렇게 평가가 갈리는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병합 전야에 일진회가 공개적으로 '합방 청원'을 한 반면, 대한협회는 거기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 별 다른 의미가 없다는 뜻은 아니지만, 단순히 이것만으로 그렇게 극단적으로 다른 평가를 내려도 좋은 일일까? 이것이 당대 역사상을 온전하게 드러내는 최선의 방법인가?

기존의 역사인식을 재검토하며 개항기/대한제국기 정치사를 모색하는 시도들이 꾸준히 지속되어 왔다. 학계에서 '대한제국의 성격'을 둘러싸고 적잖은 논쟁이 벌어진 바도 있었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이 책은 대한제국 정치사를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저자가 최근까지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하여 이해하기 쉽게 풀어쓴 대중교양서이다.

이 책은 크게 보아 두 가지 테마를 담고 있는데, 하나는 러일전쟁~병합에 이르기까지 일제의 침탈 전략과 그 실행 과정이고, 또 하나는 조선 내부 각 정치세력의 대응 양상이다. 여기서 저자가 공력을 기울인 부분은 후자이다. 위에서 조금 썼지만, 병합 전야의 정국에서 조선 정치세력들은 단순히 친일-항일로 양분될 수 없는 복잡한 대응을 보여주었다. 흔히 애국계몽운동을 벌였다고 알려진 이들과 친일로 나아갔다는 이들 사이에 구분선이 그렇게 명확하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조선 지식인들의 '근대 인식'이 병합 전야의 정국에서 어떻게 굴절되어 나가는지의 문제도 중요한 관심거리이다. 이 책은 이러한 문제들에 관한 최근의 연구 성과들을 최대한 쉽게 대중적으로 풀어내었다. 대한제국이 식민지가 되기까지의 '과정'을 충실히 풀어낸 역사서술로서는 손색이 없다. 그 이상의 총체적인 역사해석을 바란다면, 책 말미의 참고문헌에 적힌 2005년 이후의 연구 성과들을 스스로 뒤적여 볼 수밖에!


19대총선 결과를 바라보며 同時代史를 헤치며

정권심판 대 대선전초전

선거 결과는 충격적이다. 결과적으로 보아 유권자 대다수는 이번 총선을 '정권심판의 장'이라기보다는 '대선 전초전'으로 생각했다고 볼 수 있다. 나는 줄곧 이번 총선이 전자의 의미를 띠었다고 생각했고, 또 그래야 한다고 믿었는데, 내 생각과 기대가 현실과는 어긋났던 것이다. 한국현대정치사를 공부하는 내 입장에서는 상당히 공부가 되는 경험이다. 한국현대정치사의 흐름을 파악하는 역사적 시각과 현실정치를 파악하는 안목은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 좀 더 사려 깊게 생각하며 공부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보아 이번 선거가 '대선 전초전'이었다는 측면에서 볼 때, 야권연대는 질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현 정권 심판이라는 네거티브구도에 매몰되어 생산적인 정치적, 정책적 의제를 내세우는 데 소홀했다. 지난 지방선거 등에서 야권연대가 바람을 일으킬 수 있었던 이유가 기본적인 반MB구도에 무상급식이라는 진보적 의제를 더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번 선거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하여 바람을 일으키는 데 실패했다. 또한 박근혜과 맞장을 뜰 수 있는 대표주자가 없었다는 점도 불리하게 작용했다.

내 생각에는 야권연대가 네거티브구도에 매몰된 이유는 아무래도 이른바 '나꼼수 현상'이 크게 작용했기 때문인 것 같다. 나꼼수는 그야말로 '반MB 네거티브'의 전형이다. 이명박 정부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파헤치면서, 대중의 커다란 호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네거티브를 넘어 어떠한 생산적인 의제를 내세우지는 못했다. 사실 내세우지 '못했다'라고 하기보다는 그러지 '않았다'고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술자리 뒷담화' 비슷한 나꼼수에게 네거티브 이상을 바라기는 어려운 일이다. 문제는 나꼼수가 아니라 거기에 매몰된 야권연대의 선거전략이었다.

의제 형성과 관련하여 통합진보당의 책임은 뼈아프다. 사실 이러한 문제에 가장 유의하며 노력해야 하는 주체가 바로 진보정당 아닌가? 선거정국 동안에 통합진보당은 이런 저런 공천 문제와 곧이은 이정희 후보 사퇴 문제로 내홍을 겪느라 사회적 의제를 제기하고 공감대를 만들어가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지 못했다. 야권연대가 시간적으로 촉박한 일정이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는 있겠지만, 결국 변명일 뿐이다.

대표주자의 부재는 사실 위에서 얘기한 구도 측면보다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진보개혁진영의 대표주자는 사회적 의제 형성과 밀접하게 연관되며 등장하게 마련인데, 후자가 부족하니 전자가 등장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아무튼 박근혜처럼 전국을 커버하는 대표주자가 없었기 때문에 야권연대의 바람을 일으키기 힘들었던 부분이 있다.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의 앞날

통합진보당은 13석으로(지역구 7석 + 비례 6석) 진보정당사상 최대 의석을 얻었다. 다만 정당득표율 10.3%는 만족스럽지 않다. 지난 2004년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이 단독으로 얻어냈던 득표율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때는 참신성이 무기였지만, 이번에는 의제형성이 무기여야 했다. 앞으로 통합진보당의 과제는 사회적 의제를 제기하고 공감대를 형성해가는 실력을 보여주는 일이다. 또한 19대 국회에서 수적 열세를 벌충하는 전투력을 보여주어야 할 임무도 가지고 있다. 전투지휘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노회찬과 심상정 두 명이 모두 당선한 것은 천만다행이다. 아직까지 '화학적 결합'이 잘 되지 않고 있는 당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 둘의 역할은 막중하다. 노심 두 지휘관을 필두로 한 원내의원단의 활약에 따라 당의 존속 여부가 결정될 터이다.

야권연대의 앞날은 불안하다. 과연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이 불가피하게 일어날 책임론과 내부분열을 추스르며 의제형성과 대권주자레이스라는 까다로운 과제들을 감당해나갈 수 있을까? 선거결과에 크게 실망한 야권연대 지지 대중의 마음을 다독이며 계속 연대의 힘을 키워나가는 것이 당면 과제이다. 지금으로선 야권 정치인들의 분발을 기대할 뿐이다.

진보신당

예상대로 진보신당은 3%를 넘기지 못했고, 더욱 처참하게도 2%조차 넘기지 못하여 등록말소를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소식을 보니 통합진보당에 참가하지 않은 사회세력을 아우르며 재창당에 나설 계획이라고 한다. 두 진보정당이 완전히 통합할 길은 없는 것일까? 일단은 상대적으로 '강자'인 통합진보당이 실력을 보여주는 가운데 통합의 명분을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 원내에서 진보정당의 실력을 보여주며 통합노선이 효과적이라는 점을 설득해야 한다.


선거를 하루 앞둔 단상 同時代史를 헤치며

중요한 선거를 하루 앞둔 날, 마음을 추스르고 공부를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선거정국 관련 글은 선거가 끝나고 나서 쓰려고 했지만, 공부도 안 되는 김에 어지러운 단상이나 적어본다.

1. 통합진보당

통합진보당의 당면 목표는 20석을 얻어 원내교섭단체를 확보하는 것이다. 목표치는 대략 지역 8석+ 비례 12석 정도인데, 현실적으로 쉽지는 않다. 기사들을 보니 정치컨설턴트들은 대략 최대치 15~16석 정도를 예상하고 있다. 과연 이렇게 된다면,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나는 진보정당이 성장하기 힘든 한국정치 토양에서 이 정도의 성과도 적지 않은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비판적인 이들은 진보정당이 원칙과 자존심을 버리는 구차한 '통합'을 이루면서까지 얻은 결과가 고작 그것뿐이냐고 힐난할 수도 있을 터이다.

나는 이번 선거정국을 지켜보면서, 예전부터 그랬지만 진보정당이 어떻게든 존재감을 보여줄 정도로 원내에 다수 진출해야 한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하나는 예전부터 생각했던 바이지만 또 하나는 최근에 깨닫게 된 부분이다.

예전부터 생각했던 첫째 이유는 진보정당의 대중성 강화이다. 지금 진보정당에게 '원칙과 자존심'은 차고 넘친다. 긴 세월 동안 독자노선을 굳건히 견지해오면서 이룬 성과이다. 남은 과제는 진보정당이 실제로 우리들 삶의 질을 고양시키는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대중에게 어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원내에 다수 진출하여 존재감을 보여주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국정을 책임지는 자리를 맡아 실력을 보여주어야 한다. 진보통합노선에 비판적이었던 이들은 원칙 없는 통합은 진보정당의 '순수성'을 해칠 것이라고 우려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절대 그럴 일은 없다. 차라리 다시 깨지면 깨졌지 먹혀들어갈 리는 없다고 본다. 진보정당을 만들어온 사람들이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첫째 이유가 진보정당의 외적 측면이라면, 둘째 이유는 내적 측면의 문제이다. 바로 최근의 이정희 대표 후보 사퇴 파동을 보면서 든 생각이다. 언론에서 '경기동부연합'이라 부른 정파는 분명 그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정당에 정파는 당연히 있는 것이고, 자연스레 '당권파' 또한 있는 것이다. 문제는 정당 내에서 정파끼리 경쟁하는 정치문화의 '질'이다.

나는 이번 사건을 접하면서, 진보정당의 정치문화가 상당히 후진적이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었다. 그런 일이 비단 이번에만 벌어진 돌출적인 사건이 아니라, 예전부터 으레 해왔던 관행이라고 한다. 당권파가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비도덕적이고 불법적인 행동을 아무렇지 않게 해왔던 것이다. 정치문화의 측면에서만 본다면 진보정당은 오히려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보다 후진적일 수 있다. 적어도 두 정당들은 과거 선거에서 엎치락 뒤치락 하면서 자의든 타의든 정당문화를 개선해왔다. 지난 2001~2002년 민주당이 내홍을 거치면서 보스정치체제를 청산하고 국민참여경선을 도입하는 정당체제 혁신을 이루었던 사실이 한 예이다.

진보정당이 주목을 받지 못했던 예전에는 그늘 속에서 쑥덕쑥덕 해도 별 탈이 없었다. 탈이라고 해야 당내에서 조그맣기 그지없는 '파이'를 놓고 지지고 볶다가 당이 쪼개져 버렸던 것뿐이다. 어찌 되든 여론은, 유권자들은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야권연대를 통해 진보정당이 사회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자, 그늘 속에서 창궐했던 곰팡이 같은 악폐들이 비로소 그 추한 모습을 천하에 드러냈다. 축축하고 냄새 나는 이불은 햇볕에 내다 말려야 하듯이, 진보정당도 사회에 그 속내를 다 드러낼 때 비로소 악폐를 치유할 수 있다. 말로만 청산을 외친다고, 좁은 당 안에서 이념 노선 운운하며 지지고 볶는다고 문제는 해결될 수 없다. 진보정당의 후진 정치문화를 치유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면서 신속한 수단은, 바로 국민의 관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진보정당은 반드시 원내에 다수 진출해야 한다.

2. 김용민

김용민 사태를 지켜보면서, 역시 선거정국에서는 '프레임'이 중요하다는 점을 실감한다. 김용민의 발언은 분명 조국 교수의 지적대로 금도를 넘은 풍자이고, 본인 역시 과오를 통감하고 있다. 그러나 진보개혁 성향의 언론과 지식인들이 이러한 원칙에 입각하여 책임론을 제기한 순간부터 수구언론의 프레임 낚시에 훽 걸려들었다. 나는 처음부터 김용민 사퇴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축이었는데, 사태 발생 직후 프레시안과 한겨레에서 사퇴를 요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실망했다. 김용민 발언 자체의 윤리성 문제와는 별개로 이 사태는 시작부터가 수구언론이 마련한 프레임 싸움이었는데, 진보성향 언론이 미숙하게 대처하면서 상처가 커졌다. 김용민 개인에게든, 진보개혁진영에게든.

아무튼 일단은 진중권이 제기하고 나꼼수가 수용한 방식으로 봉합은 되었다. 김용민 심판은 노원구민에게 맡기고, 국민은 MB심판에 주력하기로 말이다. 김용민의 운명은 알 수 없다. 부디 내일 번개를 벌인다는 나꼼수가 축배를 들 수 있길 바랄 뿐이다.

3. 안철수

안철수가 좀 더 적극적인 방식으로 야권연대를 응원하길 바랐는데, 기대보다는 어정쩡하게 끝냈다. 투표 참여를 독려하는 태도 자체는 야권연대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지만, 포지티브하게 지지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히는 전략보다는 김이 빠진다. 어쩌면 진보성향 유권자들보다는 보수성향 유권자들을 염두에 둔 행보일 수도 있다. 지금부터 박근혜와 각을 세우면 좋을 것이 없다고 누군가가 조언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투표율 70%를 넘기면 안철수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뭐, 진짜로 기적처럼 70%를 넘기게 된다면, 안철수가 하기 전에 민주당과 통합진보당 사람들이 그보다 더한 지랄발광을 떨겠지만.

4. 소망

정말 야권이 압승을 거두었으면 좋겠다. 이만한 실정에, 그만한 비리에, 거기다 민간인 불법 사찰까지, 이런 짓을 해놓고도 새누리당과 박근혜가 승리를 거둔다면, 정말 우울해질 것 같다. 이렇게 깽판을 치고도 승리를 했으니 그 다음부턴 또 얼마나 말아먹을까. 야권연대가 이겨야 한다. 여소야대 국회를 만들어 대선을 위한 칼을 갈아야 한다. 그 온갖 실정과 비리, 불법의 진상을 규명하고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권력을 만들어야 한다.

선거는, 투표는 많은 것들을 바꾸어 왔다. 실제 한국 현대사가 그랬다. 투표가 아무 쓸 짝에도 없던 것처럼 보였던 독재정권 시절에도 선거는 역사의 흐름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1968년 삼선개헌 국민투표는 유신체제의 서곡이었고, 1978년 10대 총선은 유신체제 종말의 신호탄이었고, 1985년 12대 총선은 전두환 정권 붕괴의 씨앗이었다. 투표는 한국현대사의 소소한 양념이 절대 아니었다. 내일의 선거 역시, 많은 것을 바꾸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관악구 총선 후보 초청 고등교육정책 간담회 내용 메모 서울대 법인화

* 어제(4월 3일) 서울대법인화반대공동대책위에서 주최한 관악구 총선후보자 초청 고등교육정책 간담회가 있었다. 주로 서울대 법인화 문제와 관련하여 후보자의 정견을 듣는 자리였다. 간담회에서 나온 이야기를 정리해보았다. 속기록은 아니고, 내가 직접 메모한 내용을 토대로 간략하게 정리한 글임을 유념해주시길. 대학원생모임에 먼저 올린 글을 퍼온 것이다.

참석한 후보자는 관악갑에 유기홍 후보
(민주통합당), 관악을에 김희철 후보(무소속), 이상규 후보(통합진보당)입니다. 김성식 후보(무소속)는 참석 예정이었으나 선거운동 일정을 이유로 불참했답니다.

먼저 세 후보의 정견발표 순서입니다.

* 유기홍 후보 정견발표

17대 국회에서 교육위 간사 활동, 법안심사소위원회 위원장 활동하면서 줄곧 법인화 반대 입장. 교육부와 대립하는 관계였음.

법인화는 민영화와 비슷한 논리이다. 시장논리를 우선하기 때문에 순수학문보다 돈 잘버는 학문을 육성하게 만든다. 순수 연구활동보다 수익사업에 치중하게 만든다. 직원과 교수의 신분이 불안정해진다. 등록금 인상 문제도 있다.

당선될 경우 19대 국회에서도 교과위에서 활동할 결심이다. 자신의 입장은 확고한 법인화 반대 입장. 19대 국회 들어가면 법인화법 폐지법률안을 다시 제기할 것이다.

고등교육재정교부금법 입법을 강력히 추진할 것이다.(고등교육 재정 지원 확대) 사립대의 투명성을 요구하여 적립금을 풀게 만들 것이다.

법인화의 논리인 대학자율성 물론 중요하지만, 대교협(한국대학교육협의회)이 주장하는 류의 자율성은 사학비리를 자유롭게 저지를 수 있는 자율성이다.

* 김희철 후보 정견발표

법인화법의 문제는 일단 날치기 통과되었다는 것. 수익사업에 치중했다. 기초학문 홀대한다. 등록금 인상될 것이다. 즉 고등교육의 공공성보다 시장논리 우선이다.

고등교육 재정 부족이 제일 심각한 문제이다. 법인화론자들은 수익사업으로 재정을 충당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다. 결국 등록금을 인상할 가능성이 크다.

서울대는 국공립대 중 등록금이 제일 높은 수준이다. (등록금 인상 문제를 특히 집중해서 비판했음) 등록금 인상은 돈 많은 집 학생만 유리한 교육 양극화를 불러올 것이다. 등록금 인상을 하지 않는다 해도, 돈 잘 버는 응용학문만 육성하고 기초학문 홀대할 것은 자명하다.

국회의원이 된다면 법인화 재론하여 등록금 인상은 반드시 막을 것.

* 이상규 후보 정견발표

법인화는 사실 '민영화'의 포장이나 다름없다. 민영화 논리는 이미 망해가고 있는 미국 탐욕자본주의의 산물. 법인화로 인해 모든 대학구성원이 자본, 이윤 논리에 빨려들어가게 될 것. 교육, 연구의 자유에 위배된다.

사실 법인화는 의료법인 영리화 문제, FTA 추진 등 신자유주의 흐름과 궤를 같이 하는 문제이다. 즉 법인화 반대는 신자유주의 양극화 막아내는 투쟁의 일부이다.

국회에서의 개혁입법도 중요하지만, 신자유주의 양극화를 막아내는 사회 여러 부문의 투쟁을 묶어내어 커다란 투쟁으로 만들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법인화도 폐지하고 교육공공성을 강화해야 한다.

그 다음 토론자들의 토론 순서입니다.

* 최갑수(서양사학과 교수, 서울대 법인화공대위 상임대표)

법인화를 현실적으로 폐기할 수 있을까? 결코 쉽지 않다.

여러 국유재산 양도를 둘러싼 문제들, 김세균 교수 징계 문제 등 현안 거론. 이렇듯 법인화로 인한 문제는 앞으로 더욱 심각해질 것.

국회에서 법인화법 문제 다룰 때, 사실 최악의 경우는 법인화법에서 공공성 측면을 강화하는 개정이 이루어지고, 이러한 법을 통해 모든 국공립대가 법인화 추세로 가는 것.

단순히 과거상태로의 원상회복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고등교육 체제 전반을 개혁하는 속에서 법인화 문제를 해결해야.

* 정상준 (서울대 시간강사)

최근 시간강사 처우 관련 고등교육법 개정 거론, 시간강사 문제제기 (자세한 설명 생략)

사실 대학에서 시장논리가 가장 강하게 관철되는 사안이 시간강사 문제이다. 시간강사들이 제기하는 핵심 쟁점은 고용불안정을 해소해야 한다는 것.

* 박소영 (대학원생)

야당 총선공약집을 보면 공통적으로 국공립대 네트워크를 주장하지만, 서울대 법인화에 대한 평가와 고민이 전혀 없다.

대학원생의 수가 상당히 많아졌는데도 불구하고 대학원생 관련 공약은 전무하다. 대학원수업의 내실화 방안 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학부생 입장에서는 등록금 문제도 중요하지만, 교육내실화도 중요한 문제이다. 교육내실화는 시간강사 처우 개선, 조교/TA 처우 개선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이다.

그 다음으로 후보자들 답변입니다.

* 유기홍 후보 답변

법인화법 폐기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국회에 들어가면 모든 선택지를 놓고 이 문제를 다룰 것이다.

시간강사 문제도 심각하다. 17대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아쉬웠다.

아무튼 이런 현안들을 해결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고등교육 재정을 확충하는 것이다.

서울대 법인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국공립대 네트워크 공약은 약간 단순하게 생각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 김희철 후보 답변

법인화는 신자유주의의 맥락에 있어 문제다. 17대 국회 들어가면 바로 재론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고등교육 재정 확충이다. 이것이 교육내실화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이상규 후보 답변

법인화 폐기는 야권 정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면 가능하고, 통합진보당이 교섭단체가 되면 확실하다.

국공립대 네트워크 정책은 이른바 '서울대 폐지' 담론에서 비롯한 것인데, 그 핵심은 '학벌서열화'를 폐지하자는 것이다.

학벌서열화 폐지와 관련하여 개인적인 아이디어를 말씀드린다면, 높은 학력을 요구하지 않는 직업들(이를테면 건설노가다)에 대하여 경제적 보상을 한껏 높여준다면 굳이 대학에 가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 다만 이러한 이야기는 거대담론이므로, 19대 국회에서 당장 해결할 수 없고 장기적인 플랜을 세워 검토해야 할 것이다.

시간강사 문제는 자본 논리에 의한 시간강사 길들이기의 측면이 있다. 국회 차원의 해결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각 교육주체들이 단결하여 직접행동을 벌이는 속에서 해결방안을 만들어야 한다.

대학원생, 학부생 문제 역시 각 주체들의 적극적인 직접행동이 필요하다.

한국사회를 재편하는 커다란 논의 속에서 법인화 문제를 해결해나가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청중 질의 시간에 정근식 교수(사회학과)가 서울대구성원과 관악구 국회의원이 정기적으로 만나 정례간담회를 열자는 제안을 했고, 세 후보 모두 동의했습니다.


총선정국 단상 (청와대 불법사찰 문제를 바라보며) 同時代史를 헤치며

결국 돌고 돌아 불법사찰이다. 한동안 FTA 재협상 문제가 이슈가 되면서 진보-보수 구도가 부각되었고, 새누리당은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이른바 '야당심판론'이라는 황당한 슬로건을 꺼내들기도 했었다. 하지만 진보진영과 민주당이 정권교체를 당면 목표로 삼은 야권연대에 집중하면서, 전략적으로 '이명박 정부 심판론'을 부각시켜 '민주-반민주' 구도를 강조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이때 때마침 반민주 독재의 역사적 상징과도 같은 '불법사찰' 문제가 터져나오면서, 총선정국을 격랑으로 몰고가고 있다.

이명박 정부 시기에 트위터 등 SNS나 팟캐스트방송 같은 새로운 통신매체가 등장하면서 확실히 기존 보수 신문 언론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만, 지금 돌아가는 총선정국을 보면 그 변화를 정말로 실감하게 된다. 총선정국에 들어오면서 보수언론은 진보-보수 구도를 부각시키면서 진보를 '색깔론'으로 압박하고 보수의 '쇄신'을 찬양하는 의제설정 전략을 밀어붙였다. 강정마을 문제나 야권연대 여론조사 문제 등을 가지고 진보진영이 '종북적'인 데다가 비도덕적이고 무능력하다며 비난하는 한편, 박근혜가 새누리당을 '쇄신'했다고 칭찬하면서 자기네들에게 유리한 구도를 짜려 했다.

진보-개혁진영은 보수진영과 달리 야권연대의 파괴력을 높일 수 있는 민주-반민주 구도를 형성하려 노력해 왔다. 대표적인 사례가 나꼼수와 최근의 오마이뉴스였다. 나꼼수는 작년부터 줄곧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성'를 비판해왔다. BBK나 자원외교, 인천공항 매각 등 숱한 사례를 발굴하며 '권력의 사유화' 측면을 부각시켰고, 한편으로는 '선관위 의혹'을 선도적으로 제기하며 정권의 반민주적 행태를 고발했다. 최근 오마이뉴스는 '이털남' 코너를 통해 불법사찰 문제와 청와대의 축소 은폐 의혹을 파헤쳤다. 그러다가 KBS 새노조가 만든 뉴스프로그램에서 결정적인 특종을 뻥 터뜨린 것이다. 만약 이 특종이 정상적으로 지상파방송을 통해 보도되었다면, 그 파급력은 더욱 어마어마했을 터였다. 오랫동안 정권교체를 위해 칼날을 갈아왔던 진보개혁 진영 미디어가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다.

각 정치세력의 프레임 전략이야 차치하고라도, 이 불법사찰 문제는 터질 수밖에 없었고, 또 마땅히 터졌어야 할 심각한 사안이다. 청와대가 직접 조직을 가동하여 불법적인 사찰을 전방위적으로 벌였다는 것도 중대한 문제이지만, 더욱 심각한 것은 그 문제를 축소, 은폐하기 위해 온갖 불법을 자행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 문제가 총선을 앞두고 터지자, 당장 자신의 치부를 가리려고 전임 정권을 탓하고 그 잘못을 침소봉대하는 처사까지 저지르고 있다. 이 정권의 도덕불감증은 도대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 이토록 청와대의 '격'을 떨어뜨린 정권은 분명 앞으로도 보기 힘들 것이다.

청와대 불법사찰 문제는 분명 총선정국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며칠 뒤면 여론조사 결과를 공포할 수 없게 되므로, 아마도 그 영향이 어떠했는가는 총선 투표 결과가 나와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총선 이후이다. 불법사찰 문제는 앞으로도 반드시 규명해나가야 한다. 전임 정권들이나 현 정권이나 상관없이, 불법사찰은 반드시 백일하에 진상을 밝히고 엄단하며,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확실한 규범을 확립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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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대학원생 자치준비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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