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에 무엇을 기대할 것인가?

한겨레나 경향, 오마이뉴스 등 진보 성향의 언론들이 연일 헌재의 미디어법 판결을 비판하고 있다. 일리 있는 비판이고, 많은 시민들이 거기에 호응하고 있다. 누리꾼들이 창의력을 동원하여 갖가지 수사로 헌재의 판결이 보인 비논리를 비꼬아대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민주당이 처음에 동원한 수사인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가 가장 가슴에 와닿는다. 오늘 본 "당선은 되었지만 대통령은 아니다"라는 수사도 꽤나 걸작으로 느껴진다.

헌재를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한편으로, 헌재에 애초부터 너무 큰 기대를 걸었다는 냉정한 분석도 가끔씩 보인다. 사실 나 역시 처음부터 헌재에 그리 큰 기대를 걸지 않는 축이었다. 물론 마음 한편으로 기대를 하기는 했다. 만약 헌재가 어떤 형태로든 미디어법에 제동을 걸지 않는다면, 이명박 정부 남은 기간 동안 미디어법은 꾸준히 살아움직이며 설사 다음 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더라도 더이상 되돌릴 수 없는 형국을 만들어낼 가능성이 높다. 헌재가 나름대로 절차의 부당성을 지적했는데도 불구하고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정부여당의 행태를 보면, 한국 미디어의 미래는 정말 암울해 보인다. 미디어법이 정말로 통과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고, 때문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졌다. 하지만 나는 헌재가 결국 정부여당의 독주를 막지는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최장집이 노무현 탄핵 판결이나 행정수도 위헌 판결을 사례로 들며 '제왕적 사법부'의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나는 최장집의 이러한 견해에 동감하는 편이다.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자 태생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엘리트들이 모여 있는 사법부에 한국민주주의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한을 쥐어주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이 '제왕적 사법부' 개념의 요체이다. 미디어법 문제는 누구나 알듯이 한국민주주의의 성격을 형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는 지극히 정치적인 문제였다. 혹자는 헌재가 법리적인 판결을 하지 않고 정치적으로 판결했다고 하여 비판하지만, 정치적인 문제를 정치적으로 판결했다고 하여 마냥 비판만 가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번에도 우리는(혹은 민주당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식으로 헌재에 정치적 판단을 맡겼고, 헌재는 판단을 했다. 비록 정부여당이 그 판단을 받아들이는 태도가 영 마뜩치 않긴 하지만, 우리가 헌재더러 왜 이럴 걸 예상하지 못하고 비논리적으로 절충해버렸냐고 비판하는 것은 온당하지만은 않은 태도라고 생각한다.

나는 오히려 헌재가 정부에게 완전히 무릎을 꿇고 미디어법을 옹호하지는 않을까 걱정했다. 그래서인지 비논리를 감수하고라도 절충을 하여 절차의 부당성이나마 꼼꼼하게 지적한 헌재가 할만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인상을 받고 있다. 과연 이번 미디어법 판결에서 드러난 헌재의 행태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헌재가 사법기관인 만큼, 판례를 근거로 하여 법리적인 측면에서 헌재의 과거와 현재를 평가할 수 있겠는데, 그 일은 내 소관이 아니다. 역사학도인 나는 역사적인 견지에서 헌재의 과거와 현재를 평가해야 하리라. 87년 민주화가 꽃피운 열매 중 하나로서 국민의 기본권을 지키는 최후 보루라는 사명을 띠고 1988년 설립된 헌법재판소가 어떠한 판결을 통해 한국사회와 어떠한 관계를 맺으며 지속해 왔고, 그런 가운데 한국민주주의 속에서 어떠한 역사적 위상을 지니고 있는지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연구할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자세히 살펴볼 여력이 없어 아쉽다. 그저 인상비평 정도만 적을 수밖에 없겠다.

정치학의 논의 틀을 빌려와 생각해보면, 87년 민주화는 '위로부터의 보수적 민주화'였고 그렇기 때문에 절차적 민주주의는 고수하되 실질적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노력에는 소극적인 정치사회 구조를 형성했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 몫은 여전히 비판의 끈을 놓지 않은 진보적 시민사회의 것이었다. 독재정권 시기의 보수독점 정당구조가 기본적으로 해체되지 않고 이어진 까닭이었다. 한편으로 사법부 차원에서 87년 체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조치로서 헌법재판소가 설치되었다. 독재정권 시기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태도로 국가가 국민을 억누른 시기였고, 사법부는 그 책임의 일부분을 지고 있었다. 헌재의 임무는 강대한 정부 앞에 선 나약한 국민 개개인을 가장 후방에서 지켜주는 일이었다. 즉 절차적 민주주의의 붕괴를 가장 마지막에 저지할 책임을 맡은 기관이라 볼 수 있다.

헌재는 많은 진보적인 판결을 내려온 바 있다. 거칠게 구분하면 크게 두 기준을 제시할 수 있다. 하나는 상술한대로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판결이고, 또 하나는 독재정권 시기 노정되어온 한국사회의 '비정상성'을 수정하는 판결이었다.(물론 두 기준 사이에는 많은 중첩되는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주로 정부의 위법하거나 부당한 행정처분에 대한 구제 판결들을 들 수 있다. 헌재는 수많은 판결을 통해 헌법에 명시된 자유권적 기본권이나 청구권적 기본권의 범주를 확정하고 보호해왔다. 최근의 예를 들자면 집시법에 대한 헌법불합치 판결을 들 수 있다. 그동안 헌재는 여러 차례 집시법의 독소조항들을 비판하면서도 한정 합헌 등의 판결을 통해 근본적인 수정을 가하지 않아왔는데, 그나마 이 정부의 독선을 가만 두지 않고 헌법불합치 판결(그나마 이마저도 절충을 가했지만)을 내린 것은 의의가 있는 대목이다.

후자의 경우에도 많은 사례를 들 수 있겠는데, 당장 떠오르는 사례는 호주제 위헌 판결이다. 호주제는 전근대적인 제도였고, 한국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해서는 극복해야 하는 제도였다. 그러나 사회적인 논쟁이 있었고, 반대세력의 목소리 또한 만만치 않았다. 논쟁이 민감하게 전개되는 와중에서 헌재는 용단을 내렸다. 약간만 과장하면 '국민의식을 배반하는' 진보적인 판결이라고 볼 수 있는 여지도 있었다. 한국사회가 과거의 질곡을 벗고 '정상사회'가 되는데 헌재가 기여한 바가 분명 적지 않았다.

거칠게 주장하자면, 헌재의 역할은 딱 거기까지이다. 최장집이 제기한 '제왕적 사법부'의 문제의식 안에서 사고한다면 헌재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한국사회의 정상화를 이끄는 그 이상으로 나가는 것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옳지 않기도 하다. 실질적 민주주의를 이끄는 힘은 시민사회의 원동력과 정당정치의 민주화이기 때문이다. 엘리트주의는 민주주의를 근본적으로 진전시키지 못한다.

최장집의 논의를 끌어들이면 흔히 지나치게 원론적인 논지라고 비판받곤 하는데, 암튼 원론적으로 말하자면 탄핵 판결이나 행정수도 판결, 그리고 미디어법 판결 등은 모두 헌재에게 지나치게 기댄 사안이었다. 한국사회에서 진행되는 극히 민감한 민주주의 갈등의 문제들은 헌재가 모두 감당하기 힘들다. 비용 대 효율로 따져 가장 손쉽게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사법적 판단으로만 민주적 갈등을 해결하려 한다면 결국 그 갈등은 미봉될 뿐이다. 행정수도 문제나 군가산점 문제가 위헌 판결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초미의 갈등 사안이 되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되는 바가 있다. 아마도 미디어법 문제 역시 앞으로 그러한 경로를 밟을 가능성이 크다.

현실적으로 정부의 힘이 강한데다가 그 힘을 견제할 사회적 통로가 넓지 못하고, 이명박 정부 들어 좁은 통로는 오히려 더더욱 좁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시민사회든 야당이든 비용 대 효과가 뛰어난 사법적 판단을 어느 정도 활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극히 원론적인 시각일 테지만, 민주주의의 진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어디까지나 제대로 된 '선출된 권력'을 만들고 견제하는 정치참여의 힘이 아닐까.

by 자유로픈 | 2009/10/31 02:47 | 同時代史를 헤치며 | 트랙백 | 핑백(1) | 덧글(0)

민중의례와 임을 위한 행진곡을 기억하며


(아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투쟁 투쟁 투쟁 투쟁 투쟁!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

1. <임을 위한 행진곡>을 떠올려보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린 노래로서, 대개 한국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숨져간 수많은 이들을 다함께 추모하는 의미로써 불리는 민중가요이다. 백기완의 시를 가사로 하여 광주지역 문화운동가인 김종률이 작곡한 노래이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 대변인으로서 끝까지 도청을 사수한 윤상원과 1979년 겨울 노동현장에서 숨진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을 내용으로 하는 노래굿 '넋풀이'에서 영혼 결혼을 하는 두 이의 영혼이 부르는 노래로 처음 발표되었다. 그후 민중운동/시민운동/학생운동 차원에서 어떤 행사나 집회를 할 때마다 여는 노래로서 불러왔다. (위키피디아 참조)

임을 위한 행진곡은 한국의 대표적인 민중가요이지만, 90년대 이후에는 해외에서도 많이 불리는 민중가요이다. 특히 방글라데시, 태국, 버마 등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민중이 한국 민중가요를 수입하여 자기네 식으로 가사를 바꿔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그중 하나가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70~80년대 초반 태동한 민중가요는 크게 나누어 찬송가풍과 러시아민요풍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 노래는 처연하면서도 장중한 분위기를 지닌 러시아민요/행진곡의 영향을 받았다. 한국 민중문화가 러시아민요를 '번역'한 이 노래를 동남아시아에서 다시 '번역'하여 불렀으니 요즘 일각에서 흔히 말하는 '삼중번역'된 민중가요이기도 한 셈이다.

한국사회에서 민중운동이 위축되고 민중문화가 침체하면서, 임을 위한 행진곡 역시 예전에 비해 인지도가 많이 낮아졌다. 내가 대학을 다닌 2000년대 초반의 분위기가 이미 그러했다. 그나마 내가 속한 과/반의 경우에는 민중문화가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어서 나는 이 노래를 자주 접할 수 있었다. 새내기 시절 어떤 과/반 학생회 행사에 참여했을 때, 서로들 정신 없이 막 웃고 떠들다가도 행사 시작과 동시에 이 노래를 부르면서 분위기가 급작스럽게 엄숙해지는 모습을 보며 느꼈던 위화감이 새삼 기억난다. 선배가 되어 이 노래를 부를 경우에도 후배들의 익숙치 않은 팔뚝질과 더듬거리는 입모양을 보며 역시 위화감을 느끼곤 했다.

전경이 교정에 상주하고 사복형사들이 이야기를 엿들으며 배회하는 탓에 마음 놓고 웃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에는 이 노래가 대학사회의 분위기에 딱 들어맞았지만, 대학문화가 좀 더 발랄해지고 경박해진 오늘날에는 분명 잘 맞지 않는 노래이다. 다만 상징이란 게 대개 그러하듯이, 이 노래 역시 '그때의 기억'을 잠시나마 일부러 되새기기 위한 노래이고 그래서 굳이 국민의례의 애국가 대신 불리는 노래이다. 윤하가 야구장에서 멋들어지게 애국가를 부른다고 분위기 자체가 바뀌지는 않듯이, 임을 위한 행진곡 역시 그러할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 어색함을 얼마나 기꺼이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지금은 내가 속했던 반에서도 임을 위한 행진곡은 거의 잊힌 노래이다. 올해 1학기 초 학생회 행사 중 하나인 '교양학교'(새내기를 위한 교양 세미나 기획이다)를 마무리하는 '졸업식'에 놀러갔었는데, 칠판에 적힌 식전 의례에 무려 '애국가 제창'이 있었다. 내가 전역 후 복학하여 느낀 대학사회의 여러 상전벽해들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었던 사례였다. 모르면 차라리 부르지나 말 일이지, 하필이면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애국가란 말인가. 나는 친한 후배 한 명에게 간곡히 부탁하여(아마도 그이에게는 압박으로 다가갔겠지만) 애국가 제창을 취소시켰다. 그렇다고 새삼스레 아무도 모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수는 없는 일이고, 아예 식전의례 자체를 생략해버린 바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고학번의 '꼬장'이 없는 이상 앞으로는 학생회 행사에서 애국가를 부르는 일이 많아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니, 솔직히 아쉽고 기분이 상하기도 한다.

2.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기억들의 엇갈림

개그하는 정부, 국민의례로 애국심 기르려 하나(오마이뉴스)

정부가 공무원노조를 압박하는 여러 꼬장 중 하나로 민중의례를 선택하여 공세를 가했다. 신지호 의원의 "애국가 대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는 행위는 대한민국 공무원이기를 포기한 것"이라는 비난이 이러한 공세가 가진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나름대로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는 색깔론 공격이다.

나는 상식을 가진 대한민국 시민이라면 이러한 색깔론 논리로 이 사태를 바라보고 있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지금의 한국사회는 색깔론이 대놓고 횡행할 만한 사회는 아니라고 본다. 하지만 나는 이 사태를 바라보면서 조금 딴 생각을 해본다. 많은 이들은 비록 색깔론 논리로써 임을 위한 행진곡 대신 반드시 애국가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면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민중의례 자체를 어떻게 여기고 있을까?

상술했듯이 지금의 한국사회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나 민중의례가 거의 잊혀 온 상황이다. 대부분의 시민들은 이 노래를 부르지 못할 것이고 민중의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할 것이다. 이 정부의 민중의례를 소재로 한 꼬장은 분명 삽질이지만,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잊혀 왔던 임을 위한 행진곡의 이미지는 이 사태를 통해 사람들 앞에 다시 불려나왔다. 그 이미지는 과연 어떠한가?

모르긴 몰라도, 다시금 불려나온 임을 위한 행진곡과 민중의례의 이미지는 분명 우리가 현재 가지고 있는 저항의 기억, 민주화의 기억과 맞닿아 있을 터이다. 위 기사의 필자는 <국기에 대한 맹세> 이야기까지 끌어오며 민중의례는 경직된 국가주의에 저항하는 민중의 자주적인 애국심을 나타내고자 하는 의지라고 주장한다. 아마도 80년대에는 이러한 주장이 그 시절 표현으로 '즉자적'으로 설득력을 얻었을 것이고, 그래서 보편적인 문화로 정착했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 이러한 주장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먼저 기억하고 공감해야 한다. 그때 그 시절의 많은 경험들을 말이다. 기억과 공감이 부족하다면 민중의례 또한 많은 이들에게 국민의례 만큼이나 어색하고 억압적으로 다가가기 마련이 아닐까.

만약 정부의 이러한 공세가 기본적으로는 색깔론 삽질로 여겨지더라도, 한편으로 민중의례 또한 뭔가 어색하고 철지난 것이라는 이미지가 유포된다면, 그것으로 이미 이 논란은 극우세력의 승리가 될 터이다. 기억과 공감이 시도되기도 전에 이미지와 선입견은 널리 유포된다. 소위 '운동권'의 딱딱하고 진지하기만한 어투와 비타협적이고 교조적인 주장(이 또한 이미지와 선입견의 문제가 있지만)은 양념이 되어 그 유포에 일조할 것이다.

3. 불편한 기억을 불편하지 않게 추억하기 위하여

기억은 이성적 판단의 영역이면서 감성적 공감의 영역이기도 하다. 어떤 '불편한' 史實을 발굴하고 배우는 일을 계속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그 '불편함'을 기꺼이 참는 공감에서 우러나온다. 민중의례, 사실 너무나 불편하다. 임을 위한 행진곡, 사실 불량하기 그지 없는 노래이다. 위 기사의 필자는 이 노래가 일반적인 민주화 열망을 표현하고 있는 건전한 노래라고 변명하지만, 그렇지 않다.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리는 노래라는 점부터 그러하다. 국가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총칼을 겨누고 다가오고 있는데 무슨 알량한 애국심 타령인가. 광주 시민들은 무기를 쥐고 항쟁의 깃발을 올렸고, 처참하게 살육당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은 국가라는 거대한 존재가 가장 나쁜 태도로 자신 앞에 다가섰을 때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노래했다. 이 노래는 한국사상 최악의 기억 중 하나인 사건을 굳이 일부러 잊지 않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굳이 미화할 필요도 없고, 몇 가지 수사만으로는 미화하기도 힘든 노래이다. 프랑스 국민들이 무시무시한 가사로 점철된 라 마르세예즈를 자신들의 역사 속 중요한 한 페이지를 장식한 노래로 여겨 수백 년간 불러왔듯이, 우리들 역시 이 불편한 노래를 굳이 잊지 않기 위해 불러온 것이다.

나는 엄숙하기 짝이 없는 민중의례와 불편하기 그지 없는 임을 위한 행진곡 등의 민중가요를 어떤 상황에서든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형태의 '광장'이 출현하는 시점에 발맞추어 YB가 구슬프기 짝이 없는 아리랑이라는 전통 민요를 새롭게 '번역'하여 대단한 인기를 끌었었다. 새로운 '아리랑'의 인기는 한국사회에서 레드 컴플렉스를 넘어 비로소 광장 문화를 체험하기 시작하는 시민들의 '여유'를 반영하는 현상이었다. 만약 현재 한국의 진보진영이 그만한 여유를 허락받을 수 있다면 70~80년대 민중문화를 새롭게 '번역'하기 위해 나설 수도 있을 터이다. 하지만 지금 그러한 여유는 전혀 없다. 김제동 쫓겨나는 걸 보면 더 할 말조차 없다.

민중의례를 소재로 하여 공무원노조를 탄압하고 있는 이번 사건에 대한 인상을 조금이라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다면, 2007년 개봉했던 영화 <화려한 휴가>나 다시 한 번 보자고 권하고 싶다.. 기억하실지 모르겠는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는 두 주인공의 '가상결혼식' 사진을 배경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 장중하게 울려퍼진다. 바로 이 노래의 등장 배경을 모티프로 삼은 장면이다. 감독은 실제로 윤상원을 모델로 하여 남주인공을 설정했다가 너무 영화가 무거워질 것을 염려하여 '평범한 서민'으로 변경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만은 이 노래를 틀기 위해 설정을 바꾸지 않았다.

가상의 사진 속에서, 현실에서 죽어간 이들은 모두 밝게 웃고 있지만 살아남은 단 한 명인 여주인공은 무표정할 뿐이다. 그 표정들 사이의 괴리를 보면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불편함'을 되새겨보면 좋지 않을까. 그러한 공감이, 불편했던 기억을 불편하지 않게 추억해내기 위한 첫걸음이라고 생각한다.

선덕여왕은 올 겨울방학 때나 좀 볼 수 있을런지...(출처)

by 자유로픈 | 2009/10/27 00:26 | 同時代史를 헤치며 | 트랙백 | 덧글(0)

어떤 記憶

조부는 1921년 음력 1월 강원도 인제 남면에서 태어났다. 본래 증조부 가족이 살던 곳은 경기도 파주였다. 증조부는 만세운동을 했다가 일제 헌병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몸이 크게 상했다고 한다. 결국 핍박을 못 이겨 강원도 인제의 어느 산골로 피신했고, 거기서 조부를 낳았다. 조부는 삼형제 중 막내였다. 조부가 어릴 적에 가족은 서울로 이사 갔다. 지금의 신촌역 부근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고 한다.

조부의 큰형은 장남 답게 성실한 기질을 지녔다. 그러나 작은형은 깡패였다. 종로를 휘어잡고 있던 김두한 밑에서 깡패질을 하고 돌아다녔다. 행동대장 격의 지위까지 오르면서 근방에서는 꽤나 악명 높은 깡패였다고 한다. 조부는 1944년 징용 당해 일본 사세보 해군기지로 끌려갔다. 활주로를 닦는 공사에 투입되었는데, 미군 폭격기의 공습 때문에 여러번 생사의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거기서 해방을 맞았는데, 일본군이 징용자들을 방치한 채 퇴각해버리는 바람에 귀국을 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다고 한다. 결국 기지 근방에 살던 일본인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밀항선을 타고 귀국했다.

해방 직후 혼란스런 정국, 큰형은 성실하게 일했지만 작은형은 김두한을 좇아 우익청년단 활동에 뛰어들었다. 조부는 전쟁 발발 직전 중매를 통해 조모와 만나 결혼했다.

전쟁 직후, 가족은 제때 피신하지 못했다. 인민군은 우익청년단 활동을 했던 작은형을 잡아갔고, 그후로 소식이 끊겼다. 큰형과 조부는 가까스로 피신했다. 인민군은 매일 집으로 와 큰형과 조부를 내놓으라고 협박했다고 한다. 가족은 때를 보아 증조모의 친척들이 살고 있던 경기도 양주로 야반도주했다. 1951년 음력 1월 한겨울, 미군 폭격기가 쏟아붓는 폭탄으로 인한 굉음과 진동 속에서 조모는 부친을 낳았다.

부친이 태어나자마자 가족은 남쪽으로 피란을 가야했다. 1.4후퇴의 여파였다. 가족은 국군의 퇴각 행렬을 따르는 피난민 무리에 합류하여 남쪽으로 향했다. 인민군과 중공군의 추격을 피하기 위해 야음을 틈타 험한 산길로 이동했는데, 부친이 자지러지게 울 때마다 조모는 가슴이 내려앉았다고 한다. 피난 와중에 큰형 부부 내외는 미군 폭격기가 떨어뜨린 폭탄에 맞아 폭사했다. 조부는 그 장면을 생생히 목격했다고 한다. 조부는 전쟁 와중에 두 형을 모두 잃었다.

가족은 피란 중에 엉겁결에 떠내려왔던 대전에 그대로 정착했다. 가족은 대전과는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집도 땅도 친척도 모두 서울과 그 근방에 있었다. 조부는 언제라도 다시 서울로 올라가겠다고 말하곤 했지만, 왠일인지 끝까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조부는 대전방직에서 목수 일을 하며 5남매를 키웠다. 가난에 찌든 생활이었다.

손자가 웬만큼 머리가 굵어졌을 때 처음으로 진지하게 꺼낸 말은 "결혼해서 자식을 많이 낳아라"였다. 그때는 왜 굳이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었다. 손자가 고등학교에 들어간 후 언제인가, 비로소 징용시절을 비롯한 옛날 이야기를 해주었다. 한국근현대사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던 손자이지만, 그 이야기에 담긴 삶의 무게는 어렴풋하게나마 알 수 있었다. 조부는 손자에게 두어 차례 징용시절 이야기를 해주었다.

손자는 언젠가 차례상 앞에서 조부의 형제들에 대해 여쭈었다. 전쟁 때 돌아가셨다고만 들었기 때문에 궁금했었다. 하지만 조부는 손자에게 자신의 형제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손자는 조부의 영정 앞에서 부친의 입을 통해 전쟁 시절의 이야기를 비로소 들을 수 있었다. 같이 듣고 있던 사촌 동생은 꼭 드라마 속 이야기 같다며 웃었다.

부친은 가족이 어디 한 곳에 발붙이고 살지를 못했기 때문에 번성하지 못했다며 안타까워 한다. 파주에서 인제로, 서울로, 양주로, 그리고 대전으로. 혼란했던 시절 여느 가족이 그렇지 않았겠느냐마는 우리 가족도 참 많이 고생했다. 조부는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손자에게 결혼해서 자식 많이 낳으라고 훈계했고, 조모는 손자에게 밥은 절대 남기지 말고 다 먹어야 하는 법이라고 이르곤 했다.

노무현 정부는 일제시기 징용자 보상 정책을 시행했다. 부친이 서류를 꾸며 제출해보았지만, 생존자의 경우에는 거의 보상을 받지 못할 것이란 답변을 들었을 뿐이었다. 조부의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조부가 실망한 이유는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도 아들이나 손자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때문이리라 짐작한다. 어쩌면 그 한편으로는 새삼 느낀 상실감 때문이기도 할 터이다. 징용자 보상 이야기는 조부로 하여금 젊은 시절의 고난을 상기시켰을 것이고, 거기에는 징용 시절 뿐만 아니라 전쟁 시절의 기억 역시 사무쳐 있을 것이다.

조모께서 일찍 세상을 떠나신 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외롭게 삶을 견디셨던 조부는 2008년 음력 9월 27일 세상을 하직하셨다. 손자는 조부 생전에 아무것도 해드리지 못했다. 조부는 손자가 결혼하고 출세하는 걸 보고싶다 하셨지만, 손자는 조부 생전에 그 모습을 보여드리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저 알고 있었을 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이제 소상(小喪)을 앞두고 내가 다짐할 일은 가족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이다.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언젠가 결혼하고 자식을 낳는다면, 때를 보아 짐짓 심드렁하게 옛날이야기 하듯 기억을 전해주는 일이다. 그나마 조부의 손자가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들 중 하나이리라.

by 자유로픈 | 2009/10/06 21:54 | 얕은 단상들 | 트랙백 | 덧글(0)

이산가족 상봉에 부쳐 - 오영재 시인을 기억하다



북한의 '햇볕정책' 덕에 오랜만에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졌다. 실질적으로는 17차 이산가족 상봉(화상 상봉은 7차례). 그러나 이번 상봉에서는 공식적으로 차수를 붙이지 않았다. 전문가들 분석으로는 6.15공동선언의 위상을 격하시키려 하는 정부의 인식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덕분에 차근 차근 제도화 되어가고 있던 적십자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사업은 이명박 정부 하에서 졸지에 '일회성 행사'로 전락했다. 지난 두 정부는 16차례의 이산가족 상봉을 성사했다. 이명박 정부 하에서는 앞으로 이산가족 상봉을 과연 또 할 수 있을까. 가슴이 답답하다.

이산가족 상봉 소식을 접할 때마다 한 편의 시를 떠올려왔다. 혹시 오영재 시인의 이름을 기억하는가? 2000년 6.15공동선언이 합의된 이후 처음으로 열린 이산가족 상봉 때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남한에 살아계신 어머니의 소식을 접하고 절절한 사모곡을 지어 발표했었지만, 끝내 생전에 만나지 못한 채 어머니의 영전 앞에 자신이 지은 사모곡들의 육필원고를 바치며 오열했던 오영재 시인.

1990년 재미 문인 김영희 씨는 북한 방문 중 이북의 문인들과 만나 나눈 이야기를 한겨레에 기고했다. 이 기고문에 오영재 시인의 사연이 실렸다. 오 시인의 동생 형재 씨는 그 사연을 읽고 형님이라는 사실을 확신했다. 오형재 씨는 김영희 씨를 통해 오 시인에게 편지와 가족사진을 전달했다.

 어머니(곽앵순 씨)의 생존을 확인한 오 시인은 이듬해 5월 <아, 나의 어머니 -  40년만에 남녘에 계시는 어머니의 소식을 듣고>라는 제목의 연작시를 미주 지역의 문예지 <통일예술>에 발표한다.    

그러나 어머니 곽 씨는 1995년 세상을 떠났다. 위의 사연을 계기로 첫 상봉단에 포함된 오영재 시인은 가족들이 들고 나온 어머니의 영정 앞에서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는 같은 아픔을 공유하고 있는 이남의 많은 국민들의 눈시울을 붉게 했다.

2000년은 내가 고3이었던 때이다. 문학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이 시에 대해 말씀해주셨다. 이 시를 읽는 순간 가슴이 콱 막혀 머릿속이 하얘졌다고 하셨다. 측량할 수 없는 그 삶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서였을까. 나 역시 그 선생님의 말씀이 잊혀지지 않고, 첫 이산가족 상봉 방송을 보면서 눈물을 쏟으시던 내 어머니의 모습도 잊혀지지 않는다. 어머니의 눈물을 보면서 따라 울었던 나 자신의 모습 역시 잊혀지지 않는다.

천 만 이산가족이 짊어져온 상처 입은 삶의 무게는, 우리가 앞으로 몇 방울의 눈물을 더 흘려야 온전히 덜어낼 수 있을까. 분명한 사실은, 이산가족의 맺힌 한을 풀어주는 일만 따져도, 지난 두 정부가 남북화해를 위해 썼던 매년 1인당 5천원 꼴의 비용은 너무나도 값싼 것이라는 점이다.

오영재 시인의 연작시 中

늙지 마시라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도

이날까지 늙으신 것만도
이 가슴이 아픈데
세월아, 섰거라 
통일되어
우리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

너 기어이 가야만 한다면
어머니 앞으로 흐르는 세월을
나에게 다오 
내 어머니 몫까지
한 해에 두 살씩 먹으리

검은머리 한 오리 없이
내 백발이 된다 해도 
어린 날의 그 때처럼
어머니 품에 얼굴을 묻을 수 있다면

그 다음엔
그 다음엔 내 죽어도 유한이 없어
통일 향해 가는 길에
가시밭에 피 흘려도
내 걸음 멈추지 않으리니

어머니여 
더 늙지 마시라
세월아 가지 말라 
통일되어
내 어머니를 만나는 그 날까지라도
오마니! 늙지 마시라, 어머니여….


오영재 시인 관련 참고 기사 - 최재봉, <오영재 시인 육필원고 공개>, 한겨레, 2000-8-17일 5면, 언론재단 검색.

by 자유로픈 | 2009/09/27 00:29 | 同時代史를 헤치며 | 트랙백 | 덧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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